남북전쟁 중 북군 지휘관이던 애브너 더블데이(Abner Doubleday, 1819~1893) 소장의 모습. 사실 그는 남북전쟁 중 첫 전투가 된 포트 섬터(Fort Sumter) 방어전에 투입되어 "첫 발"을 쏴 사실상 남북전쟁을 개시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아직도 잘 굴러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케이블 카를 설계해 특허를 받았고, 무엇보다 사후인 1908년 "야구를 발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물론 뒤에 기술하겠으나, 논란이 있긴 함)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더블데이는 누구일까?
더블데이의 군 경력은 생각만큼 화려하진 않은데, 일단 집안이 내내 군인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미국 독립전쟁 참전용사, 아버지가 1812년 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다. 아버지는 전후 미 의회에서 의원을 지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애브너 더블데이를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삼촌 집에서 기거하게 됐고, 그 장소가 '야구의 발상지'가 된 쿠퍼스타운(Cooperstown)이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측량기사로 2년간 활동하다 1838년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고, 1842년 총원 56명 중 24등 석차로 졸업해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첫 전쟁 경력은 1846년~1848년에 벌어진 미-멕시코 전쟁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인디언들을 상대로 싸운 세미뇰(Seminole) 전쟁에 참전했다. 남북전쟁 개전 당시 그는 대위였으며, 포트섬터에 배치되어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 1805~1871/준장 예편) 소령 휘하의 부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군이 요새를 포위하고 첫 포격을 시작하자 그 포에다 대고 첫 반격을 해 "연방군의 첫 한 발"을 발사했다.
북군 지휘관들이 전쟁 말 이전까진 다 패전을 거듭했으므로, 그도 군인으로 뛰어났다고 말하긴 어렵다. 남북전쟁 초전부터 소령으로 진급한 뒤 반도작전(Peninsula Campaign), 2차 불런(Bull Run) 전투 등 다양한 전투에 참전했지만 남군의 명장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1821~1904) 장군과 1:1로 붙어 대패하는 등 우수한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쟁 말엽에는 소장까지 진급해 포토맥 군 산하 1군단을 지휘했으며, 안티에담 전투와 게티스버그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활약했다.
더블데이는 종전 직전에 가서 워싱턴 D.C.로 배치되어 행정업무를 맡았고, 군사법원 운영 책임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종전 후 미 연방군이 평시전환 되면서 소장에서 중령으로 환원됐으며, 1867년 35 보병연대장으로 보임되면서 다시 대령까지 진급했다. 이 때 1867년 샌프란시스코로 배치되어 케이블 카 특허를 구입했고, 운영 허가를 받아 실제 케이블 카를 설치했다. 하지만 보직이 바뀔 때 특허를 팔고 떠났다고 하심. 1873년에 대령으로 예편 했으며, 이후 군법을 좀 다루었던 경력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편 후 주로 작가 활동을 했으며, 남북전쟁 회고록이나 게티스버그-챈슬러빌 전투 회고록 등을 남겼다고 한다.
■ 더블데이의 "야구의 발명" 설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했다는 이야기는 미국에서 야구 리그가 정립된 이후에 계속 도시괴담처럼 떠돌던 이야기라, 아예 내셔널리그 사무국에서 밀스 위원회(Mills Commission)를 설치하고 "야구의 기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일단 더블데이 이야기가 나온 근거 중 하나는, 초창기 야구 잡지인 비컨 저널(Beacon Journal)에 광산기사인 애브너 그레이브스(Abner Graves)가 편집장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에서 그레이브스는 "(아직 군인이 되기 이전) 더블데이가 현재의 야구장(의 다이아몬드) 필드를 구상하여 그린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레이브스에 따르면, 더블데이는 1839년 4월 3일에 자기가 구상한 경기장 형태에 따라 뉴욕 주 쿠퍼스타운에서 첫 야구 경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더블데이는 이 경기를 "타운 볼(town ball)"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베이스를 4개 설치하고 "투수(pitcher)"가 약 1.8m 떨어진 고리 안에 공을 던지면 그 앞에 서 있던 타자(batter)가 이 공을 쳐 내는 식으로 경기를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더블데이와 그레이브스는 둘 다 그린즈 스쿨(Green's School)에 다니고 있었고, 경기 상대방은 오테세고 아카데미(Otesego Academy) 학생들이었다.
그레이브스는 경기 모습을 묘사하면서 각 팀에는 11명의 선수를 두었으며, 이는 투수 1명, 포수 1명, 각 루 근처의 내야수 3명, 루에서 조금 멀게 떨어진 내야수 2명, 그리고 다이아몬드 바깥 쪽의 외야수 4명으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그는 첫 경기를 함께 치렀다고 기억하는 7명의 이름을 명시했으며, 이 스토리는 비컨 저널에 <애브너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하다>라는 제목으로 수록됐다.
이 기사는 1905년 <스포팅 라이프(Sporting Life)>지가 다시 취재를 했다. 이 잡지가 다시 취재를 하면서 그레이브스에게 "혹시 (야구의 발명을 증명할) 증거 같은 것은 없는가"라고 문의했는데, 이에 그레이브스는 더블데이가 그렸다는 다이아몬드 경기장 구상도를 보냈다. 그레이브스는 "오리지널 구상도는 아니고, 당시 구상도를 기억하는 대로 다시 그린 것"이라고 밝혔으며, 해당 경기에 참가한 첫 선수들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증거를 찾긴 어려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스포팅 라이프>는 취재 결과 이 "첫 경기"는 1938년~1841년 사이에 치러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비록 그레이브스의 주장을 뒷받침 할 뚜렷한 증거는 못 찾았으나 이야기 자체는 신빙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1907년에는 앞서 언급한 내셔널 리그의 밀스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으며, 앞서 취재한 잡지사들로부터 취재 내용을 모두 전달 받았다. 조사 결과 위원회는 "야구는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했다고 할 만 하며, 분명히 이 스포츠는 미국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원 년도를 1839년으로 잡았다. 밀스 위원회는 더블데이가 왜 처음 구상했던 '타운 볼'을 '베이스 볼'로 바꿨고, 인원 수를 11명에서 줄였는지에 대해 "아마도 경기로 발생할 부상 가능성을 줄이려고 한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덴버 포스트(Denver Post)>지가 1912년에 그레이브스와 다시 인터뷰를 했으며, 이 인터뷰는 앞서 그가 밀스 위원회에 증언했던 내용과 약간 다른 내용이 포함됐다. 그레이브스는 경기가 열린 해가 1940년이었다고 못 박았으며, 자기 자신도 이 '첫 경기'에서 '그린 칼리지(Green College)' 선수로 뛰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쿠퍼스타운 인근에 해당 이름을 가진 학교가 있었거나 있던 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말한 학교는 더프 소령(Major Duff)이 세운 '클래시컬 밀리터리 아카데미(Classical and Military Academy)'라는 곳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데, 당시 이 학교가 '더프즈 그린(Duff's Green)'이라는 별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후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취재한 언론사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다. 내셔널리그는 1920년대에 '더블데이가 첫 경기'를 했다는 공간을 매입해 '더블데이 필드'를 만들었으며, 이후 1934년경 이 장소를 개조해 국립 야구박물관을 건립했다.
■ 더블데이 기원설...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신빙성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대의 사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낮게 본다. 일단 위의 증언을 한 그레이브스가 1939년에 다섯 살이었다는 사실부터 신빙성을 깎고,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나이가 일흔 한 살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주장 때와 나중의 주장 때의 디테일이 달라진 부분이 많아 아마도 노령에 따라 기억이 오락가락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는 더블데이와 '친구' 였다고 주장했는데, 문제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으로 1839년 당시 더블데이는 스무 살이었다. 야구와 관련된 증언 외에도, 그레이브스는 자신이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에서 1852년부터 일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문제의 업체는 8년 뒤에 창업했다는 점 등 전반적으로 증언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정작 더블데이 자신은 1983년에 사망할 때까지 생애에 걸쳐 단 한 번만 야구와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 그는 1871년 경 상부에 장비 조달을 요청하면서 "야구 경기용 장비"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의 추도사 중 하나에는 그가 "야외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어, 전반적으로 더블데이의 야구 발명설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 하다.
한편 역사가인 데이비드 블록(David Block)은 더블데이의 야구 발명설을 부정하지만, "아마도 그레이브스가 알고 지내던 인물은 애브너 더블데이가 아니라 더블데이의 사촌인 '애브너 데마스(Abner Demas)나 존(John) 더블데이' 였을 것으로 보았다. 둘 다 쿠퍼스타운에 살고 있었으며, 둘 다 나이도 그레이브스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 더블데이 기원설이 등장한 배경
전반적으로 애브너 더블데이의 야구 기원설은 당시 미국의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 근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분리된 '아이덴티티' 구축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정체성이 될 역사-미국의 군사력-스포츠를 연결할 '기원'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블록 역시 '미국은 더블데이 이야기가 등장하자 마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면 당시 미국은 한창 영향력을 전세계로 뻗치려던 시점이었고, 이 시점에 미국의 독립적인 정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했다.
진실이야 어떻든, 더블데이의 '전설'은 아직도 미국 야구의 '기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야구가 미국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분명하되 발명자는 불분명하다는 것이 정설로 인정된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듯, 2010년 MLB 사무국장인 버드 셀리그(Bud Selig)는 더블데이를 일컬으며 "그는 (야구를 발명한 사람이 아닌) 야구의 아버지"라고 표현했고, 쿠퍼스타운이 소속된 뉴욕 주 역시 비슷한 형태의 문구를 쓰고 있다.
한편 미국의 한 다큐멘터리는 '야구'가 실제로는 1791년경부터 행해지고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더블데이가 태어나기 50년 전부터 이미 유사한 경기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다큐멘터리는 경기가 있던 곳이 매사추세츠 주 피츠필드(Pittsfield, MA)였으며, 이 조차도 "첫 경기가 아니라 이미 '야구라는 것이 있던 상태'"였다는 기록을 찾았다. 하지만 쿠퍼스타운은 여전히 더블데이를 야구의 발명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각종 건물과 기념물에 그의 이름을 새겨 넣어 '야구의 탄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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