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625전쟁사 33

[1951. 3] 김일성 초상화에 '다 끝났다'고 적고있는 미군

미 제 11공정사단 187 공정연대전투단 (ARCT) 소속 미군 공정병이 김일성의 사진 위에 "다 끝났다(The End)"라고 적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사진가인 하워드 소츄렉(Howard Sochurek)이 촬영했으며, 장소는 불분명하나 북한의 순천이나 석촌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지에 수록됐던 사진이다. 제 187 공정연대는 1951년 3월 23일, UN군의 '토마호크(Tomahawk)' 작전에 참가해 625 전쟁 중 실시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중강습 작전을 실시했다. 187 연대전투단은 석촌전투, 원주전투, 무산리 전투에 참가했으며, 한국에 파병기간 중 총 4개의 부대표창을 받고 3명의 대원이 명예대훈장을 수훈 받았다. 이들은 전쟁기간 중 442명이 전사하고 2,115명이 부상을 입었다.

[1951] 625 전쟁 중 화염방사기를 사용 중인 미 해병대원

6.25 전쟁 중 미 해병대 병사가 북한군 진지 소탕을 위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 중인 모습. 화염방사기는 2차 세계대전까지 빈번하게 쓰인 무기였지만, 전차를 비롯한 차량류에 탑재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도태됐다. 특히 개인용 화염방사기가 도태된 결정적 이유는 안전성 문제였는데, 액체 연료를 등에 지고 다녀야 했으므로 적의 기총소사를 받거나 폭발물 파편이 잘못 튀면 그대로 폭발해 사용 중이던 병사와 주변 병력까지 모두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기본적으로 액체연료를 담고, 압축공기와 질소를 채워 화염을 방사하는 무기. 최초 사용은 7세기경 비잔틴 군이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다. 주로 요새나 진지 방화용으로 많이 쓰였으며, 벙커나 토굴에 숨은 적..

[1950. 11. 16] 청천강 인근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 병사들

1950년 11월 16일, 청천강 북방 어딘가에서 미 제 24보병사단 19보병연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나오고 있는 북한군의 모습. 이들이 군복을 벗어던진 정규군 병사인지, 혹은 게릴라, 통칭 "빨치산"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1월 초부터 미 제 19연대는 청천강 인근의 미 제 8군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영연방 제 27 여단과 협조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19연대를 제외한 24보병사단의 나머지 잔여 병력과 미 제 1군단은 전투력 복원을 위해 청천강 아래로 이동했다. 따라서 미 제 19보병연대 예하 3, 2, 1 대대만이 청천강 측방의 안주에서부터 구룡강까지 퍼져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중국 인민지원군이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다. 이들은 한국군의 전면인 군우리와 미군의..

[1953. 4. 23] 625에 참전한 패튼 장군의 아들

1953년 4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인근에서 자신의 M46 패튼(Patton) 전차를 배경으로 선 조지 패튼 4세(George S. Patton IV, 1923~2004) 대위와 버나드 프레스키(Bernard Preskey) 중사의 모습. 이들은 당시 미 제 40보병사단 140 전차대대 A 중대의 중대장과 중대원이었다. 당시 140 전차대대 예하 2개 중대는 한국군 제 12보병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 패튼 대위는 2차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인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1885~1945) 대장의 친아들이다. 당시 그는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차였으며, 휴전선 경계를 놓고 UN 진영과 공산진영이 마지막 전력을 쏟아넣는 치열한 시기에 한국에서 싸웠다. 그는 8월 휴전 무..

[1950. 11. 26] 중공 인민지원군, 625 전쟁 개입

1950년 11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인민지원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일로를 걷고 있던 북한 인민군 지원을 위해 6.25 전쟁에 개입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부터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표로 남침을 개시했으나, 미국이 지휘권을 받아 행사하게 된 국제연합군(UN군)이 창설되며 신생 국가인 대한민국 구원에 나섰다. UN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처절한 방어전을 치르는 찰나 세계 각지에서 증파된 UN군은 인천에 집결해 기습상륙을 실시했고, 이 한차례의 기습으로 양분된 인민군은 UN군과 낙동강의 한미연합군 사이에 끼어 괴멸했다. 이후 UN군과 한국군이 북상을 개시하며 평양을 점령했고, 곧 종전 시점이 다가오려는 순간 한반도에 통일 반공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있을 수 없던 중국은 전격적..

[1952. 11. 18] 휴전 협상에 가려 비밀에 붙여진 한반도 상공의 미-소 공중전

1952년, 미 해군의 F9F-5 판서(Panther) 조종사인 로이스 윌리엄스(Royce Williams) 대위는 북한의 해안지역을 윙맨과 함께 비행하던 중 소련 공군 MiG-15 네 대의 공격을 받자 이들을 모두 격추했다. 그는 총 35분간 전투를 치르면서 적기로부터 263발을 맞았으나, 전투 후 간신히 모함인 오리스카니 함(USS Oriskany, CV-34)까지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미 정부는 휴전 협상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다시 전쟁이 확전하지 않도록 소련군과의 이 교전사실 자체를 비밀에 붙였다. 이 전투 자체도 최근이 되어서야 공개됐으며, 일각에서는 윌리엄스 대위에게 명예대훈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운동이 진행 중이다.

[1954] 부상 중인 미군 병사와 대화 중인 마릴린 먼로

1954년, 6.25 참전 중 부상을 입어 일본으로 후송된 미군 병사를 방문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arylin Monroe, 1926~1962)의 모습. 당시 병사는 척추가 부러졌기 때문에 초기 치료 단계에서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여 눕힐 수 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그의 병상을 방문한 뒤 개의치않고 바닥에 엎드려 위를 올려다보며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1950. 9. 21] 영등포 시내에 진입한 미 제 1 해병연대

1950년 9월 20일~26일 사이에 촬영된 미 제 1 해병사단 병사들이 서울 시 모처에서 전투 중인 모습. 미 제 5 해병연대는 9월 20일자로 한강 도하에 성공했으며, 서울 서측방으로 접근해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미 제 1 해병연대는 (일시적으로) 한강을 남쪽에서 우회하여 북한군을 회피한 뒤 9월 21일자로 영등포 시내에 진입했다.

[1952] 진지 통로에 서 있는 영국군 병사와 한국군 증원단 병사

625전쟁 중 진지 통로 앞에서 '고개를 계속 숙이시오'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UN군 병사의 모습. 1952년 혹은 53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해당 병사는 제 1 영연방 사단 예하 28 영연방여단 더럼(Durham) 경보병연대 제 1대대 소속이다. 배경에 같이 찍힌 병사는 한국군에서 증원해 준 영연방 한국군 증원단(KATCOM: Koreans Attached to the Commonwealth Division) 소속 병사로 보인다.

[1953. 7. 27] 정전협정 체결로 625 전쟁이 기나긴 휴전에 들어가다

다소 독특한 6.25 전쟁 휴전 직후의 사진으로, 1953년 8월 10일, 휴전이 성사된 지 두 주 뒤 미 제 8군(EUSA: Eighth US Army) 병사들과 북한군 병사들이 대화하면서 라이터를 빌려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자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 :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으로부터 3년 1개월 2일 뒤인 1953년 7월 27일에 성사됐다. 휴전에 관한 정식 문서명은 이며, 이 문서는 UN측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1895~1987) 중장과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대장, 북한측 대표인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남일(南日, 1915~1976) 대장, 중공측 대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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