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역사사진 258

[1951. 3] 김일성 초상화에 '다 끝났다'고 적고있는 미군

미 제 11공정사단 187 공정연대전투단 (ARCT) 소속 미군 공정병이 김일성의 사진 위에 "다 끝났다(The End)"라고 적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사진가인 하워드 소츄렉(Howard Sochurek)이 촬영했으며, 장소는 불분명하나 북한의 순천이나 석촌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지에 수록됐던 사진이다. 제 187 공정연대는 1951년 3월 23일, UN군의 '토마호크(Tomahawk)' 작전에 참가해 625 전쟁 중 실시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중강습 작전을 실시했다. 187 연대전투단은 석촌전투, 원주전투, 무산리 전투에 참가했으며, 한국에 파병기간 중 총 4개의 부대표창을 받고 3명의 대원이 명예대훈장을 수훈 받았다. 이들은 전쟁기간 중 442명이 전사하고 2,115명이 부상을 입었다.

[1942] 팔렘방에 강하하는 일본군 기록화

1942년경 일본 화가인 츠루타 고로(鶴田 吾郎, 1890~1969)가 그린 '팔렘방으로 강하하는 신의 군대(神兵パレンバンに降下す)'라는 제목의 유화. 1942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정진집단(挺進集団/테이신슈단)'이라 불리던 일본육군 공정대가 팔렘방 전투 중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강하하면서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활주로와 네덜란드 정유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공중강습을 실시 중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전투는 일본 육군과 해군 공정대가 최초로 실시한 공정강하 작전이었으나 성과 자체는 절반의 성공으로 기록됐다(전투 자체는 일본군 측이 승리했다). 츠루다 고로는 서양화풍을 지향하는 '요가'운동의 일원이었으며, 일본미술협회 회원이었다. 전후에도 계속 화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서구풍과 일본 전통 기법을 섞..

[1951] 625 전쟁 중 화염방사기를 사용 중인 미 해병대원

6.25 전쟁 중 미 해병대 병사가 북한군 진지 소탕을 위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 중인 모습. 화염방사기는 2차 세계대전까지 빈번하게 쓰인 무기였지만, 전차를 비롯한 차량류에 탑재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도태됐다. 특히 개인용 화염방사기가 도태된 결정적 이유는 안전성 문제였는데, 액체 연료를 등에 지고 다녀야 했으므로 적의 기총소사를 받거나 폭발물 파편이 잘못 튀면 그대로 폭발해 사용 중이던 병사와 주변 병력까지 모두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기본적으로 액체연료를 담고, 압축공기와 질소를 채워 화염을 방사하는 무기. 최초 사용은 7세기경 비잔틴 군이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다. 주로 요새나 진지 방화용으로 많이 쓰였으며, 벙커나 토굴에 숨은 적..

[1942] 수류탄 위에 앉아 휴식 중인 아프리카군단 병사

1942년, 독일군의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 소속 병사 한 명이 휴식을 취하면서 맨바닥에 앉을 의자 대용으로 M24 막대형 수류탄(Stielhandgrenate) 두 개 위에 앉아있는 모습. 북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 통칭 DAK(Deutsche Afrika Korps)로 불린 독일군 독립군단. 최초 독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이탈리아군이 북아프리카 방면을 장악해 중동과 연결, 석유 등을 확보하기를 기대했지만 기대했던 이하의 약체인 이탈리아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추축국의 '약한 지점'으로 파악하고 상륙하기 시작하자 군단급 원정군을 창설하여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다. DAK는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명장 에르벤 롬멜(Erw..

[1989. 4. 18] 중국, 후야오방 사망으로 천안문에 시위대 운집 시작

1989년 4월 18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여 중국 정부를 상대로 시위에 들어갔다. 정식 시위는 이미 수일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후야오방은 당시 개혁을 주도하면서 정부의 기업 경영 간섭을 최소화하고, 전반적이면서 폭넓은 사회, 정치적 변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의 개혁 구상은 중국에는 아직 부패와 경제문제가 산적했지만 일단 이를 차치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에는 인플레이션, 부패, 불평등, 정부의 권위주의가 만연한 상태였다. 시위는 학생과 노동자 연대로부터 시작됐다. 학생들은 더 폭넓은 정치개혁을 요구했고, 특히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적 선거를 원했다. 노동자는 인플레 완화에 중점을 ..

현대사 2024.04.19

[1941. 4. 11] 동아프리카에서 로마 파스케스를 철거하는 영국군

1941년 4월 11일, 소말리아의 키스마요에서 촬영된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 이들은 당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서 파스케스(로마제국 양식의 기둥)를 철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1936~1941)는 원래 에티오피아 제국이었으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침공하여 5년간 지배했다.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뿐 아니라 이전 암하라, 하라르, 갈라-시다모- 스키오카를 아우르던 땅이었으며, 이탈리아가 점령한 뒤에는 행정상의 공식 명칭으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혹은 'AOI(Africa Orientale Italiana)'라 불렀다. 사진 속 파스케스는 로마의 12개 고대도시 중 하나인 에트루스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로마가 정복했던 에트루리아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상징은..

[1939.5.19]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이탈리아 자원군단

1939년 5월 1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민군이 내전 승리기념 퍼레이드를 하자 이탈리아 자원군단(Corpo Truppe Volontaire) 병사들이 이에 함께 참가해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상장의 사열을 받는 중인 모습. 이탈리아 자원군단은 1936년~1939년 기간 중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베테랑 병사들을 모아 파병한 원정군이었다. 최다 파병시기에는 군단 예하에 6개 차량화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병력은 7만에서 7만 5천명 규모였고 항공기도 758대나 갖추고 있었다. 내전 기간 중 이탈리아 군단은 말라가 (Malaga) 전투, 과달라하라 (Guadalajara) 전투, 북부지역 전투, 산탄데르(Santander) 전투, ..

근대사 2024.03.28

[1945] 일본군과 하룻밤(?)을 보낸 미 해병대원

이오지마 전투 중, 지친 미 해병 한 명이 근처에 있던 진지 하나에 기어 들어간 후 웅크린 채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굴 안에는 자신만큼이나 놀라 보이는 얼굴의 일본군 병사가 있었다. 일본군 병사는 곧 진지에서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중에 이 해병에게 "왜 적이 있는 걸 보고도 공격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하룻밤 같이 잔 사이인데 어떻게 쏘겠어요..."

[1978. 3. 14] 이스라엘, 리타니 작전 개시

1978년 3월 14일, 이스라엘의 리타니(Litani) 작전이 시작됐다. 수일 전인 3월 11일, 팔레스타인계 무장세력인 '파타'가 '해안도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수도 텔아비브 인근 해안가를 달리던 고속버스를 정지시킨 이들은 버스에 무차별 난사를 가해 13명의 아이가 포함된 38명의 이스라엘 인들이 사망했고, 76명이 부상을 입었다. 원래 이 공격은 이스라엘에 수감 중인 파타 간부와 맞교환을 요구할 인질을 잡을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 테러공격은 훗날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대규모 납치사건 이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으로 간주됐다. 이 테러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거점을 두고 있던 남부 레바논으로 전격 공세를 실시했다. 이스라엘은 ..

현대사 2024.03.16

[2024. 3. 13]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보여준 드골장군의 아들 타계

프랑스의 필리프 드 골(Philippe de Gaulle) 제독이 2024년 3월 13일자로 타계했다. 향년 102세.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의 아들인 그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아버지가 영국으로 탈출하자 그 또한 해군에서 복무 중 탈출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메세지를 듣고 탈출한 것은 아니었으며, 영국에서 계속 저항할 요량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자유 프랑스 해군에 합류한 그는 전쟁 내내 자유프랑스군 초급 지휘관으로 싸웠으며, 종전 후에도 계속 군문에 남았다. 해군 항공 분야에서 내내 근무한 그는 1982년 대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이후 정계로 옮긴 그는 파리를 거점으로 200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내다 은퇴했다. #인물사 #프랑스사 #현대사 #2차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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