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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7. 8] 미국 굴지의 재벌집안 출신 부통령, 넬슨 록펠러 출생

라마막 2023. 7. 17. 15:47

포드(Ford)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의 초상화.

그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꼽는) 최대의 갑부 가문인 록펠러 가문 출신으로, 원래 가업을 이어 사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다트머스(Dartmouth)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체이스 은행(Chase Bank: 현재의 J.P. 모건 체이스)과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주식회사에서 임원을 지냈다. 넬슨 록펠러는 1930년 메리 토드헌터 클라크(Mary Todhunter Clark Rockefeller, 1907~1999)와 결혼했으며, 그녀로부터 다섯 자녀를 얻었다.

그는 비즈니스 계에서 다양한 직위를 거쳤으며, 1950년 국제 개발 자문위원회(International Development Advisory Board) 위원장을 맡으면서 전기를 맞았다. 그는 이 직위를 거친 뒤 미 대통령 외교 특별고문을 지냈다. 넬슨은 대통령 특별 고문으로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정계에서 인지도를 쌓았으며, 1958년에는 선출직인 뉴욕 주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뉴욕 주지사를 지내면서 인권 개혁을 추진하고, 뉴욕 주의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교육 개혁 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넬슨 록펠러는 자신의 이름을 걸었던 모든 개혁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공화당 내 북동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자유주의 세력의 거두가 됐다.

1962, 넬슨 록펠러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마르가레타 피틀러(Margaretta Fitler, 1926~2015)1963년에 재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두 자녀를 낳았다. 넬슨은 세 차례 대선에 도전했으나 세 번 모두 전당대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1974,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대통령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으며 의회 역시 같은 해 그의 부통령직을 승인했다.

록펠러 부통령은 포드가 그에게 부여하려 한 권한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행정부 내에서 소화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 관계에는 미묘한 경쟁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펠러는 인플레이션에 대처 중이던 포드 행정부의 맨 앞에 섰으며, 행정부의 수많은 노력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하지만 1976, 포드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그의 부통령 티켓을 취소했다. 그는 이후 대선에 도전했으나 실패 후 건강 문제로 은퇴했으며, 부통령직에서 물러난지 불과 일주일 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당시 일흔 살이었다.

: 한국에서는 "록펠러"라고 번역하나, 사실 이 집안의 이름은 "로커펠러"에 가깝다.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례는 많으나(예로 들면 아버지 부시 대통령), 세계적인 초 굴지 재벌 집안의 유력 자손이 정계로 뛰어들어 우수한 업적을 남긴 사례는 많지 않으므로 오랫동안 회자되는 인물. 이름 때문에 "로키(Rocky)"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스탠다드 오일 주식회사(1911년 해산; 독과점법 때문에 43개 기업으로 분산됐으며, 그 중 가장 큰 부분이 오늘날 엑손-모빌이 됨) 창업주인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Sr., 1839~1937)의 손자이자 그의 외아들인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의 아들이다.

사실 그는 배경 면에서 정계에 발을 들일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부계 쪽은 미국 최고의 사업가 집안이었지만 외조부는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을 지낸 넬슨 알드리치(Nelson W. Aldrich, 1841~1915)였기 때문이다. 그는 넬슨 록펠러 주니어의 둘째 아들이었다.

넬슨은 190878, 메인 주 바 하버(Bar Harbor)에서 태어났으며, 뉴욕 맨하탄의 링컨 스쿨에서 고교과정까지 마친 뒤 프린스턴 대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낙방하자 차선으로 합격한 다트머스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대학교 재학 중 여름방학에 메인 주로 돌아왔다가 첫 아내인 메리 토드헌터 클라크를 만났다. 넬슨은 졸업 후 집안에서 운영하던 사업체를 돌면서 근무했으며, 첫 근무지로는 록커펠러 센터에 위치한 체이스 내셔널 뱅크에서 일하다가 1931년 이사가 되었다. 이후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은행장을 지냈으며, 이후 1945년부터 1953년에는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그는 기업가로 활동하던 중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대륙문제 협력실(CIAA: Office of the Coordinator of Inter-American Affairs) 협력관을 지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1944년 미 국무부 차관보로 임명됐다.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넬슨은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회의에 미국 대표로 포함됐으며, 그는 UN 본부가 뉴욕 맨하탄으로 유치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었다(UN본부 부지 자체가 록펠러 그룹이 기증한 땅임. 원래 록펠러 연구소 설립을 위해 마련한 부지였다).

이후 1950년까지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한 그는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지역 정치에 집중하며 선출직을 노렸다. 그는 뉴욕 주를 발판으로 삼아 연방정부로 진출하겠다는 구상을 했으며, 이에 따라 1958년 뉴욕 주지사로 출마해 몰표에 가까운 570,000표를 쓸어 담으며 경쟁자인 에버렐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을 꺾고 주지사로 당선됐다. 그는 이후에도 1962, 1966, 1970년 선거에서 내리 승리해 뉴욕 주를 든든한 자신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넬슨은 196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 등록하며 대선 출정을 선언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해에는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이 전당대회를 휩쓸었기 때문에 중도에 사퇴하고 닉슨 지지를 선언했다. 1964년에도 전당대회 단계에서 고배를 마신 넬슨은 1968년에도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당시 그의 경쟁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및 닉슨이었다. 당시 전당대회에서 레이건은 공화당 내의 보수파를 대변한 반면, 닉슨은 공화당 내의 자유파를 대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이 첨예화 되면서 분산표가 발생하는 바람에 1차 선거에서 닉슨이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넬슨과 로널드 두 사람은 끝까지 이 판을 뒤집지 못했다.

훗날 1976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대선에서 닉슨과 경쟁했던 민주당 대선후보인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1911~1978) 부통령은 1968년 선거를 앞두고 넬슨 록펠러를 자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영입하고자 제안했으나, 넬슨 록펠러가 당적을 바꾸기를 거부해 무산됐다고 한다.

중앙정부에 대한 그의 꿈은 예정에 없이 이루어졌다. 19748,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전격 사임하면서 하원 의장이었다가 부통령 자리를 승계한 상태였던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1913~2006)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당시 포드가 고려했던 부통령 후보는 넬슨 록펠러 외에 당시 NATO 미국 대사를 역임하고 있던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1932~2021)와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던 조지 H.W. 부시(George H.W. Bush, 1924~2018)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정적인 부통령으로 사실상 행정부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워낙 심각하게 치솟은 인플레 문제 등으로 포드 행정부 자체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적이 없는 대통령의 위상도 당시 행정부가 힘을 얻지 못하는 큰 이유로 작용했다. 포드는 1976년 재선 시기가 다가오자 전당대회도 뚫지 못할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자신의 러닝메이트를 바꾸기로 했다. 당시 한참 치고 올라오던 로널드 레이건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그는 베리 골드워터(Barry M. Goldwater, 1909~1998) 애리조나 상원의원을 선택했다.

포드처럼 재선을 앞두고 러닝메이트를 바꾼 사례는 그 이후로 현재까지 아무도 없었다. 포드는 훗날 자서전을 통해 이 때 넬슨 록펠러를 내치고 골드워터를 선택한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고 인정했으며,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비겁한 짓이었다"고 술회했다. 록펠러는 독자적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등록했으나 너무 늦게 선거에 뛰어들었으므로 판을 뒤집지 못했고, 공화당 대선 후보 티켓은 포드가 다시 챙겨갔지만 그는 1976년 민주당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에게 패한 뒤 "2차세계대전 이후 민의로 대통령이 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 넬슨 록펠러는 난독증(dyslexia)이 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9학년 때 낙제 직전까지 갔으나 워낙 총명한데다 노력파였으므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 총 일곱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셋째 아들인 마이클 록펠러(Michael C. Rockefellar, 1938~1961?)가 뉴기니 탐험 중 인도네시아령 남() 파푸아 섬 인근으로 갔다가 실종됐다. 그는 명문 필립스 엑세터 아카데미(Philips Exeter Academy) 졸업 후 6개월간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전역 후 하버드 대학교로 진학해 사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피바디(Peabody) 박물관 후원으로 뉴기니 원주민 연구를 위해 남 파푸아로 향했으나 19611117일에 카누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배가 뒤집혔고, 해안까지 수영해서 가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후 실제 해안에 닿는 모습이 목격됐으나 이후 영영 실종됐다.

당시 추정에는 해안에 다다른 뒤 상어나 악어 등에게 공격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훗날 조사에 따르면 인근 아스마트(Asmat)에는 식인 풍습이 남은 원주민 부족이 있었으며, 실제로 백인 표류자를 죽인 뒤 잡아먹은 사례가 있었으므로 그도 식인풍습의 희생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훗날 그의 유품 일부는 아스마트 인근에서 발견됐으나 시신이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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