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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3. 6] 패퇴하는 한국군을 수습한 명장,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라마막 2023. 2. 21. 16:40

김홍일 ( 金弘壹 , 1898~1980)  장군

6.25 전쟁 초반, 패퇴하던 국군을 다시 수습해낸 '오성장군'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의 모습. 평안북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교육 받았으며, 잠시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되자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국민혁명군에서 왕웅(王雄)이라는 이름을 쓰며 활약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봉창(李奉昌, 1900~1932)과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김홍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625 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어 적으로 상대한 최용건(崔庸健, 1900~1976)이 윈난(雲南)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준 적이 있는데, 이는 최용건이 오산학교 후배였기 때문이다.

김홍일은 국민혁명군 북벌에서 활약하며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의 신임을 얻었고, 중일전쟁 때 우한전투(1938) 등에서 102사단장으로 참전하는 등 대 활약을 펼쳐 1939년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국민혁명군 중장까지 진급했으나 19455, 광복이 다가오자 김구(金九, 1876~1949)의 요청으로 광복군 참모장이 됐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한국으로 귀국해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직권으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시켰다. 당시 그는 이승만이 건국 전부터 영입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고급 지휘관'중 한 명(다른 한 명은 도쿄 전범재판 때 교수형을 당한 홍사익[洪思翊, 1887~1946] 일본 육군 중장)으로, 그를 영입한 후 19493월 소장으로 진급시키면서 "국군이 아직 작아 드릴 수 있는 계급이 여기까지다. 하지만 중국에서 다셨던 계급까지 합하면 오성장군이시다"라고 해 '오성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귀국 후 이미 노년이던 그는 야전 지휘관보다는 후진 양성을 원해 7대 육군사관학교장에 취임했다.

6.25 전쟁 개전 직후, 8개 사단을 보유 중이던 국군은 불시의 기습에 5개 사단이 패퇴했다. 그나마 백선엽(白善燁, 1920~2020) 대령의 1사단이 제 위치에서 선전하고 있었고, 김종오(金鍾五, 1921~1966) 대령의 6사단과 이성가(李成佳, 1922~1975) 대령의 8사단은 선공해 온 북한군을 막으면서 퇴거해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이던 김홍일 소장은 군 원로회의에서 한강을 연해 방어선을 치고 지연전술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광복군 출신인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장군이나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전 국방장관, 심지어 일본군 출신의 김석원(金錫源, 1893~1978) 대령까지 동의했으나 총참모장이던 채병덕(蔡秉德, 1915~1950) 소장은 전 병력을 한 곳으로 모아 결전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방문한 옛 상관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과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과 함께한 김홍일 장군

미군으로부터 '뚱보 채(Fat Chae)'라고 불리던 채병덕은 사실 병기병과 출신으로 전투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민혁명군 장성 출신인 김홍일의 주장을 계속 무시했으며, 심지어는 '매번 패퇴만 한 장개석 군대 장군 출신이 전쟁에 대해 뭘 아느냐'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정작 모인 인물 중 유일하게 패전 상황에서 부대를 수습해 본 경험을 가진 김홍일은 적극적으로 한강 방어선을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켜야 한다고 주장 했지만, 채병덕은 끝끝내 그의 주장을 무시했으며 신성모(申性模, 1891~1960) 국방장관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튿날, 유일하게 전선에서 밀리지 않고 있던 백선엽의 1사단을 지원하러 간 그는 의외로 1사단이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의정부 방면으로 역습을 계획했지만, 곧 북한군 전차가 창경원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선엽에게 퇴거를 조언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채병덕으로부터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난색을 표했고, 이에 김홍일은 채병덕에게 1사단을 철수시키라고 다시 한 번 권유했지만 채병덕은 이번에도 김홍일의 의견을 무시했다.

한강 이북에서 계속해서 국군이 밀리자 이형근(李亨根, 1920~2002) 준장은 부대와 장비가 도하하는 동안 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군은 결국 한강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해 끊어버렸다. 훗날 한강철교 폭파는 장경근(張暻根, 1911~1978) 국방차관의 명령으로 알려졌으나, 그 책임은 공병감인 최창식(崔昌植, 1921~1950) 대령이 대신 뒤집어 쓰고 1950921일에 총살 당했다. 한강 다리가 끊기자 한강 이북에서 싸우던 국군 사단은 모두 진지를 버리고 중화기까지 포기한 채 한강 이남으로 긴급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홍일 장군은 이응준(李應俊, 1891~1985) 장군과 함께 채병덕 장군을 찾아가 한강을 제각각 도하한 병력이라도 수습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이미 지휘 능력의 한계를 보인 채병덕은 김홍일 장군의 의견을 드디어 받아들여 그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말만 '사령부'이지 사실 병력도, 참모도 없이 사령관 이름만 달게 된 김홍일은 시흥으로 곧장 달려갔으나, 그가 본 것은 전투복에서 이름표와 계급장을 떼어낸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한강 이남으로 넘어오는 모습이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이던 김홍일 장군은 깨끗하게 다려 입은 전투복을 입고 한강변에 섰으며, 도하 해 온 병력 중 지휘관을 차출해 병력을 수습했다. 기록에 따르면, 풍채가 당당한 장신의 노 장군이 한강 변에 서 있자 도하해 온 병사들은 그를 보고 그의 뒤로 가 도열 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즉석에서 부대를 편성해 모여있는 인원에서 선임 지휘관을 임명했다. 어느 정도 패퇴한 국군 부대를 수습한 그는 뒤를 보고 처음으로 그의 '참모'들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우선 애들 밥부터 먹여라."

중국에서 싸우면서 패퇴한 부대의 수습을 여러 번 해 본 그는 경험을 살려 패전부대를 효과적으로 재편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주북 소련 군사고문단장을 지낸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Vladimir Nikolaevich Razuvaev, 1900~1980)'전투력이 부실하던 군대가 갑자기 견실한 전투 부대로 탈바꿈 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그는 김홍일의 재편 직후부터 국군 포병의 사격 통제가 효과적이 되었고, 사격 정확도도 크게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수습 병력으로 한 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며, 실제 미 제 8군 예하 증원부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주일 가량 한강 방어선을 수비했다. 그는 녹아 없어졌던 5개 사단을 재편하여 강력한 전투력의 1개 군단을 만들어 냈으며,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이후 국군 제 1군단으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역습의 카드는 미군 증원군의 도착 여부였으며, 어디까지 지연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인지가 그의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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