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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3. 7. 27] 정전협정 체결로 625 전쟁이 기나긴 휴전에 들어가다

라마막 2023. 7. 27. 17:01

다소 독특한 6.25 전쟁 휴전 직후의 사진으로, 1953년 8월 10일, 휴전이 성사된 지 두 주 뒤 미 제 8군(EUSA: Eighth US Army) 병사들과 북한군 병사들이 대화하면서 라이터를 빌려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자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

: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으로부터 3년 1개월 2일 뒤인 1953년 7월 27일에 성사됐다. 휴전에 관한 정식 문서명은 <한국정전협정(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이며, 이 문서는 UN측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1895~1987) 중장과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대장, 북한측 대표인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남일(南日, 1915~1976) 대장, 중공측 대표인 펑더화이(彭德怀, 1898~1974) 원수가 서명했다.

이 협정의 골자는 1953년 7월 27일자로 현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선을 확정하고 쌍방 간 전투 행위를 중지하는 것이며, "최종적인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완전한 적대 행위의 (잠정적) 중지와 한반도 내 모든 군사 행위의 중단"을 쌍방이 합의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최초 1950년 12월 중순부터 625 전쟁을 종식시킬 협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초창기 단계에서는 한반도 내 전쟁을 모두 끝내는 한편 재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UN 사령부가 확장하여 남-북 쌍방간 충돌 가능성을 통제하도록 하는 협정으로 고려했다. 이를 위해 쌍방 간에는 약 32km 폭의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설정이 불가피했으며, 이 시점까지 잡힌 쌍방의 포로도 1:1 교환 원칙으로 모두 송환시키는 안을 만들었다.

미측은 공산 진영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에게 휴전 협상 여부를 타진하기 시작했으나, 1951년 6월, 대한민국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휴전협정 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UN 측이 승기를 잡은 이상 압록강까지 북진해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항구적 평화'는 불가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UN 사령부는 이 안에 반대했는데, 우선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 할 경우 전세계 각지에서 파병한 증원 병력을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고, 미국 역시 전쟁 장기화 부담 때문에 확전을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통일 달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국회가 먼저 "독립된 통일 대한민국"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 싸워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지지 결의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쟁 장기화에 따른 현실적 경제, 사회적 부담 등이 조금씩 대두 됨에 따라 국회의 의견이 서서히 바뀌었으며, 1951년 6월 말에는 결국 휴전 협상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사실 반대편인 북한 쪽도 휴전 협상에 반대하는 입장임은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적절선에서 휴전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김일성은 이에 계속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적도들을 모두 바다로 빠뜨려 죽이자"를 슬로건으로 밀다가 1951년 6월 27일, 휴전협상이 실제 시작된 지 17일 이후가 되고 나서야 입장을 바꿔 "적도들을 38선 아래로 밀어내자"로 고쳤다. 사실 이미 핵심 전력은 괴멸 당한 북한 입장에서, 실제 전쟁이 지속되려면 중국과 소련의  협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도 최초에는 휴전 의사가 없었다. 중국인민의용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압록강까지 올라온 UN군을 다시 38선 아래로 밀어내고 있었으므로, 이대로 계속 전쟁을 진행하면 궁극적인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돌연 입장을 바꾼 것은 1951년 5월 18일에 벌어진 용문산 전투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 63집단군 산하 187, 188, 189사단을 투입해 국군을 압박했지만, 국군 측의 패배로 끝난 사창리 전투에서 너무 일찍 퇴각해 비교적 온전한 전력을 유지 중이던 국군 제 6사단이 비교적 양호한 전투력으로 투입됐고, 영국군 27여단과 영연방군이 인근 가평 전투에서 승리해 UN 측이 기세를 타고 있었다.

UN 진영은 먼저 북한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국군 6사단을 용문산에 전개했다. 중공군은 공세를 시작한 후 한국군 진지 쪽의 저항이 강력하자 이쪽이 주공(主功)이라고 판단해 집단군 예비사단(189사)까지 모두 6사단 작전 지역으로 투입했다. 중공군은 19일 야간부터 네 차례나 공세를 실시했지만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중공군의 공세가 중지되자 북쪽 주저항선에서 내내 대기하던 6사단 7연대/19연대가 역습을 개시했다. 중공 측은 갑작스럽게 후방으로 공세가 시작되자 포위 당했다고 착각해 퇴각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6사단은 전과 확대로 방침을 변경해 추격에 들어갔다. 중공군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미군까지 기갑 및 차량화 보병을 인근에서 작전 통제시켜 임시 TF를 편성해 전개했으며, UN군 전력에 의해 화천호 일대에서 포위당한 중공군 잔적은 포위망 안에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대부분 괴멸 당하거나 화천호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전투로 UN측은 공산군 4,959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과확대 과정에서만 21,550명을 사살했다.

훗날 "오랑캐를 깬 호수"라는 의미로 "파로호(破盧湖)"로 이름이 변경된 화천호 전투(파로호 전투)로 장기전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중국은 1951년 5월 말부터 내부적으로 휴전 협상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쌍방은 양쪽 입장이 모두 '휴전 체결'로 정리되자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했으며, 협상 대표로는 북한측의 남일 상장(上將)과 미측의 찰스 터너 조이(Charles Turner Joy, 1895~1956) 중장이 지명됐다. 양측 협상단은 2주간 협상을 진행했으며, 협상할 큰 틀의 주제로 5개 항을 선정했다. 이는,

1. 휴전 절차의 적용
2. 양측 사이의 군사분계선 확정과 비무장지대 설정
3. 한반도 내 휴전 현실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 및 실제 휴전 협정을 이행할 감시 기구의 기능과 권한, 구성 확정
4. 포로 교환 방안
5. 남,북과 관련된 타국 정부의 권고안 반영 등이다.

하지만 휴전 협상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북한은 일부러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중간 중간에 으름장을 놓았는데, 1951년 8월 23일에는 휴전 협상 중인 개성에 UN군이 폭격을 가했다면서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했으나 제3국 주축으로 구성된 조사단의 조사 결과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협상은 북한 측의 거부로 한참 난항을 겪다가 다시 1951년 10월 25일, 제3의 장소인 경기도 판문점에서 재개됐다.

협상에서 가장 큰 난관은 포로 교환 문제에서 대두됐다. 당시 공산 측은 10,000명의 포로를 잡고 있었고, UN 측은 150,000명의 포로를 잡고 있었다. 공산 측은 무조건 전체 석방을 요구했지만 UN측은 사로잡은 공산 포로 중 북한/중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있어 이대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계속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53년 초, 중립국 송환위원회(NNRC: Neutral Nations Repatriation Committee)를 설치한 후 송환 거부 포로를 NNRC로 넘겨 귀환과 귀환거부 의사를 확정하기로 결정했다. NNRC는 인도 육군의 K.S. 티마이야(K. S. Thimayya, 1906~1965) 대장을 위원장으로 선임해 송환 거부 포로 문제를 처리했다.

1952년 초, 미국에서 정권이 바뀌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953~1961) 대통령이 당선됐다. 아이젠하워는 당선자 신분으로 625 전쟁을 조속히 끝낼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으며, 실제 본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계속 협상을 질질 끄는 공산 측을 협박하기 위해 총공세의 압박과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은연중에 흘렸으며, 공산 진영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의 명성 때문에 아이젠하워의 발언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였다. 이 와중에 1953년 3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 서기장이 사망하자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전쟁을 가급적 빨리 끝내고 미국과의 대결을 끝내는 쪽으로 방침을 잡았다. 소련 정부는 스탈린 사망 후 곧 UN군과 공산군 간의 적대관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중국은 이를 휴전 성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1953년 7월 19일, 쌍방은 5개항의 모든 항목에 대해 합의했으며, 7월 27일 오전 10:00시 부로 모든 교전을 중지하고 휴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쌍방이 문서를 서명하자 이번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가 설치되어 휴전 절차를 관장하기로 했으며, NNSC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웨덴, 스위스가 참여하기로 했다.

휴전이 체결된 뒤, 공산 진영은 지속적으로 "휴전" 상태를 "종전"상태로 돌리고자 노력했다.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중국의 저우은라이(周恩来, 1898~1976) 수상은 '휴전 협정에 명시된 대로 이제 휴전을 끝내고 종전을 선언해야 한다'고 했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당시 미 국무장관은 이것이 결국 UN군이 대한민국 쪽에 서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 중국의 계략이라고 판단해 평화 협정 전환을 거부했다. 그는 중국의 궁국적인 계산은 평화협정 체결로 6.25 전쟁을 종전 처리하여 UN 결의안 83호를 무산시키고, 전쟁이 재발할 경우 이번에는 UN이 참전하기 어렵게 하려는 계략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결의안 83호는 소련이 UN 안보리에서 비토(veto)권을 행사하는 대신 퇴장을 선택해 '기적적으로' 채택되어 UN군이 창설된 것인데, 이런 기적이 두 번 일어나거나 소련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6.25 전쟁은 현재까지 휴전 상태이나, 중국 정부는 1992년 대한민국 정부와 수교하면서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후 1994년부로 UN 군사정전위원회(UNCMAC: United Nations Command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에서 빠져나가 현재 군정위에는 북한과 UN 사령부만 참여 단체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북한은 현재까지 협정을 221회 이상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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