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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1994. 7. 8] 북한의 통치자 김일성 사망

라마막 2023. 7. 8. 10:42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석이 사망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해방 후 혼란기에 소련의 비호를 받으며 북한에 입성했으며,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습제의 왕조나 마찬가지인 '김씨(金氏) 조선'을 만들었다.

그는 사실상 신성 불가침의 절대 왕조를 수립해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추측이 혼재한다. 특히 말년에는 아들 김정일(金正日, 1997~2011)에게 권력 싸움에서 패해 실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미 후계작업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암살설'과 '사망 방치설' 등이 존재한다.

1994년 7월 8일 오전, 김일성은 향산군(香山郡)에 세워 놓은 초대소(별장)에 있다가 심장마비 증세가 시작됐다. 보고를 접한 김정일은 초대소로 평양에 있던 김일성의 주치의들을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날 기상이 좋지 못해 헬기가 계속 뜨지 못하다가 뒤늦게 출발했으며, 이들이 묘향산 초대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쓰기에 늦어 있었다고 한다. 의료진은 김일성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새벽 2시 경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34시간 뒤에야 공표됐으며, 곧 김정일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김일성의 사망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7월 9일 정오에 북한 전역에 공표됐으며, 대부분의 해외 국가도 이 방송을 통해 김일성의 사망 정보를 확정했다. 북한은 이후 열흘 간을 김일성 애도 기간으로 선언했으며, 장지는 곧 금수산 기념관으로 정해졌다. 대부분의 공산국가 건국자가 그렇듯 그의 시신도 미이라 상태로 보존되어 유리관 안에 안치되었으며, 이후 기념관에 오는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됐다. 그의 사망에 대한 공식적인 애도는 그의 사망 3주기인 1997년 7월까지 지속됐다.

사실 1994년은 이미 세계 정세가 상당 부분 급변한 뒤였다. 이미 소련은 1991년부로 해체했으며, 미국은 냉전의 승리를 선언한 뒤 걸프전에서 승전한 뒤였다.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2007)은 일부러 조전을 보내지 않았는데, 이 때 이미 북-러 관계가 급랭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빅토르 체르노미르딘(Viktor Chernomyrdin, 1938~2010) 총리가 이끄는 조문단이 북한에 파견되었으며, 러시아 정부는 어디까지나 총리 명의로만 조의를 표시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 1946~) 대통령은 이 시기에 이미 북한과 핵 협상을 진행 중인 상태였으므로 "(김일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양국의 적절한 대화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김일성의 사망에 대해 북한 국민들에게 조의를 보낸다. 미-북 양국 간의 대화가 재개되도록 노력한 김일성의 그간 노력에 감사한다"는 간단한 메세지를 전달했다.

김일성의 장례식은 곧 273명으로 구성된 국가장례위원회 명의로 치러졌으며, 이 명단을 통해 김일성 사후 김정일 체제의 주요 핵심 인사들이 전면에 드러났다. 당시 장례 명단 상위에 오른 인물은 김정일 이하 오진우(吳振宇, 1917~1995) 인민무력부장(원수), 강성산(姜成山, 1931~1997) 정무원 총리, 리종옥(李鍾玉, 1916~1999) 국가 부주석, 박성철(朴成哲, 1913~2008) 국가 부주석, 김영주(金英柱, 1920~2021) 국가 부주석, 김병식(金炳植, 1919~1999) 국가 부주석, 김영남(金永南, 1928~) 정무원 외교원장 겸 부총리, 최광(崔光, 1918~1997)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원수), 계응태(桂應泰, 1925~2006) 최고인민회의 법안심사위원장, 전병호(全炳浩, 1926~2014) 로동당 군수비서 등이었다.

사실 김일성의 죽음은 암살에 가깝다는 주장이 이 당시부터 현재까지 계속 존재해오고 있으나, 증명이나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암살설의 주요 골자는 1994년 이 당시 한국의 김영삼(金泳三, 1927~2015) 대통령과 김일성 간의 남북정상회담이 거의 성사 단계였는데, 이 때 이미 핵무기 개발을 한창 진행 중이던 '실세' 김정일이 이를 원치 않았으므로 성사 직전에 김일성을 암살, 혹은 의도적으로 죽게 방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살설보다는 '방치설' 쪽이 더 현실성이 높은 편이다. 일단 당시 김일성의 건강이 이미 악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을 가까이에서 직접 본 황장엽(黃長燁, 1923~2010) 전 로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은 서있기조차 힘들어 했으며, 1994년 5월에 눈 수술을 받아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김일성은 이 때 지미 카터(James Earl "Jimmy" Carter, Jr., 1924~)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하자 그를 무리해서 만나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조짐이 보였으므로, 아마도 김일성은 정상회담 준비를 하면서 무리를 해 과로까지 겹쳤을 가능성이 높다.

설득력이 높은 "방치설"의 골자는 1994년 이 날 김일성이 묘향산 초대소에서 쓰러지자 김정일이 일부러 의료진의 접근을 막았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날 실제로 기상이 좋지 못해 헬기가 뜨기 힘든 상황이긴 했으나,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육로 등 다른 수단으로 의료진이 이동을 못하게 막았으며, 이미 손 쓰기엔 뒤늦은 시간에 의료진이 현장에 도착했음에도 조기에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암살, 사망 방조설은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우선 김정일이 이 시점에 굳이 김일성을 일부러 죽이는 모험까지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 당시에는 북한 내 대부분 권력 기관이 김정일을 국가 수반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외교관인 태영호(太永浩, 1962~) 공사(現 국회의원) 역시 자신의 저서인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이미 이 시기에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에게 보고가 먼저 들어가야 했다고 밝혔으며, 심지어 김일성 비서실에서 먼저 정보를 획득하려고 연락이 오면 빙빙 돌려 시간을 끌다가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김일성에게 보고했다고 기술했다. 따라서 이미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이 굳이 북한의 "신적인 상징성"을 가진 그의 부친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괜한 부작용만 나타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어느 쪽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북한 내,외 모두에서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이며, 먼 미래에도 진실이 과연 밝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일성 사후, 국가 주석 자리는 공산주의 국가의 전통에 따라 공석이 되었으며, 김정일은 국방위원장과 로동당 총 비서, 김정은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겸 총 비서 직위에서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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