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중일전쟁 3

[1937] 독일의 도움으로 양성된 국민혁명군 제 88 사단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국민혁명군의 정예는 1926년에 체결된 중-독 군사협력조약에 의해 1941년까지 독일식으로 훈련받고 독일제 장비로 무장했다. 이들 사단은 국공내전은 물론, 중일전쟁에도 투입되어 국민혁명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제 87 및 88사단은 장제스(蒋介石, 1887~1975) 특급상장(特級上將)이 보유하고 있던 최정예 부대였다. 이 두 부대는 장제스가 1930년 초, 독일 군사고문을 받기로 하면서 양성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초대 독일 군사고문으로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시절 병무총감을 지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1866~1936) 중장을 받았으며, 젝트 장군은 부대 양성과 훈련 뿐 아니라 국공내전에서 공산..

[1937. 1. 28] 제 1차 상하이 사변 발발

상하이 전투는 중국 국민혁명군이 일본을 상대로 치른 22회의 대 회전(會戰) 중 하나로, 사실상 중일전쟁의 초전과도 같은 전투였다. 특히 국민혁명군은 70개 사단 75만 명, 일본은 9개사단 30만 명을 투입한 대 전투였기 때문에 훗날 사가들은 이 전투를 "양쯔강(陽子江)의 스탈린그라드"라 일컫는다. 또한 사실상 2차 세계대전의 핵심 교전국가 간의 충돌이었기 때문에 이 전투가 2차 세계대전의 본격적인 시발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은 이미 1931년에 만주를 침공한 뒤 1932년 상하이를 한 차례 침공했다. 쌍방의 긴장은 1937년 노구교(蘆溝橋) 사건(혹은 서양에서는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으로 증폭됐으며,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공을 개시했다. 일명 1차 상하이 전투(혹은 1,..

[1937. 8. 28] 상하이 전투 - '피의 토요일'

'피의 토요일'이 된 1937년 8월 28일, 제2차 중일전쟁 중 벌어진 상하이 전투 초에 촬영된 상하이 시내의 모습. 일본군이 상륙을 위해 사전 폭격을 실시한 뒤 불과 몇 분 후의 광경이다. 이 장소는 상하이 남부역으로, 순식간에 폐허가 된 역사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강렬한 메세지로 담겼다. 이 사진은 당시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하고 있던 전쟁 참화를 알리는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으며, 불과 한 달 만에 전세계 약 1억 3,600만 명의 인구에게 퍼져나갔다. 이후 사진 속 아기는 곧 나타난 아버지가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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