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태평양전쟁 10

[1945] 일본군과 하룻밤(?)을 보낸 미 해병대원

이오지마 전투 중, 지친 미 해병 한 명이 근처에 있던 진지 하나에 기어 들어간 후 웅크린 채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굴 안에는 자신만큼이나 놀라 보이는 얼굴의 일본군 병사가 있었다. 일본군 병사는 곧 진지에서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중에 이 해병에게 "왜 적이 있는 걸 보고도 공격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하룻밤 같이 잔 사이인데 어떻게 쏘겠어요..."

[1942. 6. 1] 요크타운 항모, 미드웨이로 이동하며 긴급 수리 실시

1942년 6월 1일, 미 해군 항모 요크타운 함(USS Yorktown, CV-5)이 진주만을 출항해 미드웨이로 출항했다. 당시 요크타운은 산호해(Coral Sea) 해전 중 심각하게 파손을 입었으므로 승선인원 1,400명이 48시간동안 조를 짜 돌아가면서 긴급 수리를 실시했다. 일본은 산호해에서 요크타운에게 치명타를 입혔으므로 분명 그 자리에서 가라앉았거나, 최소 중(重)수리를 실시하느라 미드웨이에 투입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48시간동안 수리를 마친 요크타운은 미드웨이에 등장했을 뿐 아니라, 이날 미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까지 했다.

[1945. 5]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한 아들을 전장에서 애도하는 미군 대령

1945년 5월, 오키나와에서 아들인 마이크 펜턴(Mike Fenton 1925~1945) 일병의 임시 장례식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인 미 해병대의 프랜시스 펜턴(Francis Fenton) 대령의 모습. 이 사진은 해병대 전통을 따른 한 가족이 연루된 오키나와 전투의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프랜시스 I. 펜턴 대령(준장 예편)은 1917년 8월 미 해병대에 병사로 입대했다. 그는 계급을 하나씩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가 1944년 7월 미 제 1해병사단 공병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1사단에 소속되어 펠리리우 전투에 참가해 동성훈장을 수상했으며, 그 직후 이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됐다. 펜턴 대령이 상급부대로 올라간 동안 그의 막내아들인 마이클 펜턴은 1943년 8월 17일 미 해병대에 입대해..

[1939. 4. 18] 훈련 후 아리아케 만에 부상한 일본해군 I-71 잠수함

일본 해군의 이(伊)형 잠수함인 I-71함이 훈련 후 부상한 모습. 앞에는 I-73함과 I-72함이 보인다. 1939년 4월 18일에 아리아케(有明) 만 앞에서 촬영된 사진. I-71함은 고베(神戸)에 있던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1933년 2월 15일에 착공하여 1934년 8월 25일에 진수했다. I-71함은 1935년 12월 24일에 건조가 끝나 취역했으며, 취역 후 구레(吳) 해군조병창에 배치됐다. 일본 해군은 테평양 전쟁이 임박하자 I-71함을 'Z 작전'에 투입해 진주만 공습에 참가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I-71함은 제 3 잠수함전대 20 잠수함대대에 배치하려 했으나, 작전 단행 직전에 편성이 변경되면서 제 6함대 전방원정단에 배치됐다. 1941년 11월 11일, I-71함은..

[1945. 9. 8] 2차세계대전 패전 후 귀향 열차를 기다리는 일본 육군 병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약 540만 명의 일본 육군 병사와 180만 명의 일본 해군 수병이 연합군 포로로 사로 잡혔다. 전쟁 막판에 본토 공습을 당한 일본은 파괴된 인프라 뿐 아니라 1946년에 찾아온 대 기근 때문에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거의 700만 명의 포로를 잡고 있던 연합군 역시 구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한편, 종전이 선언된 뒤에도 태평양 일각에서는 항복하지 않고 버틴 일본군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4년 3월에 가서야 항복한 필리핀 루방 섬의 오노다 히로( 小野田 寛郎, 1922~2014) 중위가 있었고, 바로 9개월 뒤인 1974년 12월에는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저항하던 나카무라 테루오(中村 輝夫, 1..

[1945. 6. 27] 적들조차 인정한 일본의 마지막 명장,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

2차 세계대전 및 태평양전쟁의 종장 중 하나인 오키나와(沖縄) 전투에서 방자(防者) 측인 일본군을 지휘한 우시지마 미쓰루(牛島 満, 1887~1945) 중장의 모습. 그는 압도적인 열세의 상황에서 지구전으로 대응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지연전에 말려들면서 오키나와 제도 점령에 2개월이 걸렸을 뿐 아니라 사상자도 35,000명 이상이 발생했다. 가고시마(鹿児島) 태생인 그는 사쓰마 번(薩摩藩) 무사였던 부친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이 현대화 된 군대를 설치하자 부친 또한 초창기 일본군에서 장교 생활을 했다. 그는 성년이 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20기로 입교했으며, 1908년에 졸업하여 육군대학에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장)나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대장) 등과 함께 28기로 입교했다. 중일전..

[1944. 1. 1] 이오지마로 가기 전 마지막 기념촬영을 한 일본군 중위 가족

2014년에 출간된 댄 킹(Dan King)의 소설 『이오지마(硫黄島)라는 이름의 무덤(A Tomb Called Iwo Jima)』은 일본어에 능통한 미국인이 쓴 소설이지만, 실제 이오지마에서 마지막 항전을 한 일본군의 내용을 담았다. 이 소설은 실화에 바탕한 내용이다. 사진은 1944년 1월 1일, 나라(奈良)현 사쿠라이(桜井)시에서 부모와 함께 마지막 사진 촬영을 한 하토리 겐이치(服部健一, ?~?) 중위와 그의 동생인 하토리 겐지(服部健二, ?~?)의 모습이다. 하토리 겐이치 중위(맨 오른쪽)는 당시 결혼을 하여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육군 예비대 소속이었으나 현역으로 전환되어 오사카(大阪) 지역의 해안포대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이오지마로 떠나는 제 10 대전차대대 ..

[1941. 12. 7]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미 구축함의 첫 한 발

많은 이들의 상상과 달리, 사실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첫 한 발"의 총격은 일본군이 아닌 미군 구축함에서 발사됐다. 12월 7일 새벽 5시 45분, 미 해군 소속 화물선인 안타레스 함(USS Antares, AG-10)진주만 외곽에 설정된 방어 해상 구역(Defensive Sea Area) 바깥에서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포착했다. 이에 구축함 워드 함(USS Ward, DD-139)이 해당 물체를 향해 오전 6:37분경 두 발의 함포를 발사했다. 워드 함의 두 번째 함포 사격이 해당 물체에 명중했으며, 뭔지 알 수 없던 '그것'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당시 명중 당한 잠수함은 선발대로 진주만에 온 일본군 소형 잠수정으로, 이 잠수정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일본군 수병은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 발생한..

[1942] 함포 사격 연습 중인 전함 무사시

1942년 전수쪽 함포 시험사격 중 촬영된 전함 무사시(武蔵)의 모습. 이 사진은 무사시 함에 승선 중이던 나가하시 타메시게(永橋為茂) 대좌의 가족이 한 언론사에 제공한 것이다. 사진은 2015년 5월 5일에 언론에 공개됐다. : 야마토(大和)급 전함. 이름은 전국시대 당시 행정구역이던 무사시국(國: 현재의 사이타마현-도쿄현-가나가와 현)에서 따왔다. 1930년대 초에 건조가 시작됐으며, 가장 크고 화력이 강한 전함 중 하나이다. 만재배수량은 73,000톤에 달하며, 주무장으론 460mm 함포 9문과 모가미급 순양함과 동일한 155mm 삼열포가 장착됐다. 실제 취역은 1942년 중순에 이루어졌으며, 연합함대 기함으로 기정되어 트루크(Truk)로 1943년 초에 이동하여 해당 해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19..

[1941. 12. 7] 일본 정부로부터도 이용당한 주미 하와이 일본대사, 노무라 제독

1941년 11월 14일, 주미 일본대사였던 기치사부로 노무라(野村 吉三郎, 1877~1964) 제독은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미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일본 정부에는 미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해 융통성 없는 "데드라인"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던 당시의 주미 일본대사. 와카야마(和歌山)현 출신으로, 일본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 26기로 입교하여 1898년 57명의 사관생도 중 2등으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00년 1월에 소위 계급을 단 그는 전함 미카사(三笠)에 배속되어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러-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 순양함 다카치호(高千穂)함 수석 항해사로 참전했으며, 전후에도 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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