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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5. 8] 남극탐험 중 최악의 상황에서 생존한 셰클턴 모험대

라마막 2023. 4. 3. 17:35

1914년 어느 날, 영국의 모험가인 어네스트 셰클턴(Sir Ernest Henry Shackleton, CVO, OBE, FRGS, FRSGS, 1874~1922)은 런던 지역 신문에 짧은 구인 광고를 올렸다.

"남성 모집. 힘든 여행 길이며 보수는 적음. 극한의 추위와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을 것이며, 극도로 위험해 생환 가능성은 보장 못함. - 하지만 성공한다면 엄청난 명예와 찬사를 얻게 될 것. - 어네스트 셰클턴"

이 짧은 구인 광고에 5,000명 이상이 지원했으며, 셰클턴은 면밀한 면접을 통해 27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상 최초로 남극 대륙 횡단을 달성하기 위해 엔듀런스(Endurance)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출항했다. 일명 "대영제국 남극대륙 횡단 원정대(Imperial Trans-Antartic Expedition)"의 여정은 1914년 8월 9일에 막을 올렸다.

하지만 이들의 창대한 여정은 초창기부터 종말을 맞았다. 엔듀런스 호가 남극 지방 빙하 지대에서 좌초한 후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영하 37도의 빙설 지역에 갇혔으며, 남극 대륙의 한 가운데에 배도 없이 고립됐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었다.

하지만 셰클턴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6명을 선발하여 가장 가까운 엘리펀트(Elephant) 섬을 거쳐 인적이 있을 사우스 조지아(South Georgia) 섬까지 약 1,300km를 남극해를 가로질러 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구조를 위해 16명의 대원을 뒤로 하고 출발한 셰클턴은 천신만고 끝에 1,500km의 바다를 항해하여 목적지에 도달했고, 다시 수 개월 후 16명을 구조하기 위해 조난 지점으로 구조대와 함께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 22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원정대는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전원 생환에 성공했다.

: 아일랜드계 영국인 모험가. 부친은 원래 요크셔 출신이었으나 영국군에 입대하려 하려다 건강이 좋지 못해 탈락하고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셰클턴은 10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 1874년 2월 15일에 태어났다. 그의 동생인 프랭크는 1907년 대영제국 최대의 도난 사건 중 하나인 아일랜드 왕관 보석 도난사건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훗날 사면됐다.

셰클턴이 성장한 시기는 통칭 <남극 탐험의 영웅 시대(Heroic Age of Antarctic Exploration)>였으며, 수많은 탐험가들이 극지방 탐험에 뛰어들고 있었으므로 그 또한 자극을 받았다. 셰클턴은 최초 로버트 스코트(Robert Falcon Scott, 1868~1912) 대령의 극지방 탐험(1901~1904)에 참가했으나 시작부터 건강 문제로 탈락해 귀국했고, 스코트는 남위 82°S까지 진출했다. 셰클턴의 두 번째 원정은 1907년 님로드(Nimrod) 원정을 시도해 남위 88°S까지 도달, 남극점에서 불과 180km 전까지 도달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당시 그의 원정대는 에레버스(Erebus)산까지 등반하여 정복했으므로 당시 국왕이던 에드워드 7세(King Edward VII, 1841~1910)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실질적인 남극점 정복 경쟁은 1911년 로알드 아문센(Roald Amunsen, 1872~1928)에 의해 완성됐다. 그러자 셰클턴은 극점 정복에서 남극대륙 횡단으로 목표를 바꿔 바다에서 출발해 바다에서 원정을 끝내는 코스를 파악했다. 이에 그는 1914년 탐험대원을 모집했으며, 앞서 언급했듯 1914년 9월에 출발했으나 배가 빙하에 갇히는 바람에 모험이 중단됐다.

당시 그는 그 자리에만 있는다면  구조될 가능성이 낮았으므로 일단 엘리펀트 섬까지 6.1m짜리 구조용 소형 보트로 항해했으나, 1,300km의 거리를 작은 배로 항해하는 것부터 목숨거는 일이었다. 그가 노린 것은 엘리펀트 섬 너머 사우스 조지아 섬에는 포경(捕鯨) 항이 있었으므로 그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트에 원정대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제임스 케어드(James Caird)의 이름을 붙였으며, 대원 중 목수가 배를 급한대로 원양 항해에 맞춰 개조했다.

셰클턴은 남은 이들을 위해 4주치 식량만 배에 선적했다. 어차피 4주 안에 사우스 조지아에 도착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케어드 호는 1916년 4월 24일에 출발했으며, 이후 15일간 남극해의 거칠고 얼어붙은 파도를 헤치며 배가 전복될 위기를 넘기고 5월 8일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상륙을 하려다가 태풍이 심해 바다에서 우회로를 찾다가 간신히 상륙했는데, 이후 이 태풍은 아르헨티나까지 올라가 500톤급 증기선을 전복시켰다.

이들은 이틑날 섬에 상륙했으며, 이후 다시 눈속을 헤쳐 51km를 걸었다. 그리고 이들 6인의 원정대는 36시간 동안 눈을 헤치고 걸어 결국 5월 20일자로 스트롬니스(Stromness)의 포경항에 도달했다. 이들은 당장 3명의 포경 어부를 만나 조난 요청을 했으며, 곧 칠레 정부와 연결이 되면서 인근에 정박 중이던 옐초(Yelcho)함을 사용하도록 허가 받았다. 옐초 함은 루이스 파르도(Luis Pardo, 1882~1935) 대령의 지휘로 1척의 영국국적 포경선인 "서던 스카이(Southern Sky)"호와 조난 지점으로 출발했으며, 이들은 1916년 8월 30일, 16명이 남겨진 지점에 도착해 남겨졌던 전원을 구출했다.

생존한 셰클턴 일행의 모습.

이들 이후 사우스 조지아 섬 횡단에 성공한 사례는 1955년 10월이나 되서야 나왔으며, 22명이 조난 생활을 했던 오두막은 거의 한 세기 뒤인 2007년 2월에야 발견됐다. 셰클턴은 1921년 다시 남극 탐험에 도전해 "셰클턴-로웻(Shackleton-Rowett) 원정대"를 꾸렸으나, 이번에는 사우스 조지아 섬에 기항한 사이에 심장마비가 와 현지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미망인의 요청에 따라 사우스 조지아 섬에 묻혔다.

셰클턴은 사실 남극 탐험의 주류 이야기가 된 스코트-아문센에 가려 있었으나, 20세기 말부터 그의 이야기가 재발견 되어 그의 "극한의 상황에서의 생존기"가 재조명을 받았다. 1922년, 모험가인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 1886~1959)는 자서전을 내면서 서문에 "스코트는 과학적인 탐험 방식을 썼고, 아문센은 속도와 효율에서 최고의 모험가였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위기에서의 대응 능력을 본다면 셰클턴을 따라갈 이는 없다"고 평가했다.

셰클턴은 2002년, BBC 방송국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명의 영국인>에서 1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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