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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독일의 도움으로 양성된 국민혁명군 제 88 사단

라마막 2023. 8. 4. 13:32
국민혁명군 제 88사단. 독일군을 연상시키는 M1935 방탄모와 목을 덮는 두터운 군복이 인상적이다.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국민혁명군의 정예는 1926년에 체결된 중-독 군사협력조약에 의해 1941년까지 독일식으로 훈련받고 독일제 장비로 무장했다. 이들 사단은 국공내전은 물론, 중일전쟁에도 투입되어 국민혁명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제 87 및 88사단은 장제스(蒋介石, 1887~1975) 특급상장(特級上將)이 보유하고 있던 최정예 부대였다.  

이 두 부대는 장제스가 1930년 초, 독일 군사고문을 받기로 하면서 양성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초대 독일 군사고문으로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시절 병무총감을 지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1866~1936) 중장을 받았으며, 젝트 장군은 부대 양성과 훈련 뿐 아니라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을 상대로 써야 할 전법이나 포위작전 계획 등을 입안했다. 특히 젝트의 포위 및 섬멸 전략은 초기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의 대 승리를 가져왔으며, 이로 큰 타격을 입은 공산군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국민혁명군의 포위망 밖으로 우회해 9,000km 가까이 행군하여 옌안으로 피신한 '대장정'을 강요 받았다.

젝트는 장제스가 공산군을 꺾으려면 최소 60개의 사단이 필요하며, 그 중 핵심 전력은 현대화 된 무장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제병협동작전에 익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강제 군비축소 기간 중 젝트 장군이 병무총감을 지내면서 10만 명으로 제한되어버린 독일군의 전력을 유지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지방 군벌들을 모아 통솔하고 있던 중화민국군의 체계 자체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민혁명군은 지역 군벌이 아닌 장제스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지휘관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독일이 중국과 적대관계인 일본과 방공협정을 체결하면서 문제의 중-독 군사 협력이 파기됐다. 그 결과 젝트는 베를린으로 귀국했지만, 여전히 87~88사단은 독일군 장비로 무장했으며 특히 철모는 독일군의 독창적인 M1935 철모를 사용했다.

1937년 8월에 촬영된 중국 국민혁명군 제 88사단. 당시 상하이로 행군 중이던 모습이다.

87사단은 1932년 1월 28일, 1.28 사건(혹은 1932년 1차 상하이 전투)이 터지자 국민혁명군 제 5군에 소속되어 참전했으며, 전투 후 난징(南京)에 주둔했다. 87사단은 이후 제 71군단에 소속되었으며, 1937년 2차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자 71군단장 장지충(张治中, 1890~1969) 장군의 지휘 하에 88사단과 더불어 상하이 시내로 진입했다. 87사단은 왕칭치우(王敬久, 1902~1968) 중장의 지휘로 일본군 해군특별육전대(海軍特別陸戦隊, 해병대 해당)가 지휘소로 쓰고 있던 쿵타 방직공장을 공격했다. 87사단은 초전에서 유지시(俞濟時, 1904~1990) 중장이 지휘하는 88사단과 협공에 성공하면서 일본 해군 육전대를 꺾었고, 8월 17일에는 후이샨 부두에서 일본 육군을 꺾었다. 또한 두 사단은 이튿날에는 일본군이 양슈푸 지구에 설치한 방어선을 돌파해 86사단과 연결작전에 성공했다. 이들은 10월 말 수저우 계곡으로 이동할 때까지 샹하이에 그대로 남았다.

일본군은 폭이 넓은 양쯔강 주변으로 진출하면서 샹하이의 국민혁명군 주력사단을 묶을 필요가 생기자 이들을 우회한 후 거대한 포켓(pocket) 안에 가둬버렸다. 87, 88 사단은 주둔지에서 버티면서 일본군의 엄청난 포격을 견뎠지만 3개월 가까이 버티면서 16,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두 사단의 피해가 큰 것을 본 장제스는 1937년 11월 25일자로 두 사단을 난징으로 퇴각 시켰으며, 두 사단은 난징에서 전투력 복원을 거친 후 일본군의 공세를 막았지만 남은 인원은 300명 남짓에 불과했다. 사단은 급한대로 계속 전투력 복원을 하면서 증원 병력을 채워 넣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최초의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부대와 거리가 멀어졌으나, 국민혁명군 지휘관들은 이들을 여전히 "정예 엘리트"로 간주하고 있었다. 두 사단 중 특히 88사단의 피해가 심각해 사실상 난징 전투 이후 영영 예전의 전투력을 되찾지 못했다.

두 사단은 1938년 우한(武漢) 전투에 참전했으며, 1944년 5월~6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이동해 웨이리후앙(衛立煌, 1897~1960) 대장이 지휘하는 중국원정군(中國遠征軍)에 소속되어 동남아지역의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웨이리후앙 장군의 룽링 공세가 실패하자 비관한 87사단의 장샤오순 소장은 거의 자살을 기도하다가 병원으로 후송됐다. 87사단은 장 소장이 유고로 지휘권을 놓자 후앙옌 소장이 대신 지휘권을 받아 1945년까지 사단을 지휘했다.

87사단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재편하여 국공내전에 투입됐다. 이들은 주로 만주 방면에서 공산군의 린뱌오(林彪, 1907~1971)를 상대로 싸웠으며, 시핑(四平) 2~3차 전투에서 린뱌오의 공산군과 정면으로 격돌했으나 이미 87,88 사단은 국민혁명군의 정예도 무엇도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두 사단의 병력 대부분은 한 주 훈련 받은 것이 고작인 신병 위주로 채워져 있었다. 87사단은 1946년 3월, 농안(農安)에서 공산군과 격돌했으나 패배했고, 다시 시핑에서 인민해방군(공산군)의 첸밍렌(陈明仁, 1903~1974) 상장이 지휘하는 54사단과 싸웠다. 87,88 사단은 공산군이 시핑을 점령하기 위해 집요하게 공격을 해왔음에도 방어선을 지켰으나, 전투가 끝났을 땐 사실상 사단은 녹아 없어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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