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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7.20] '발키리 작전',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발생

라마막 2023. 7. 20. 23:37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대령을 비롯한 이들이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Rastenburg)의 히틀러 야전지휘소인 '늑대굴'에 폭탄을 설치해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명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이라 명명했던 이 암살 계획은 원래 암살계획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작전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는 암살 미수 사건 전체를 칭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히틀러 암살 계획에는 히틀러에게 실망한 장교들 외에도 전통적인 우익 보수 성향 정치가, 고위 경찰, 그리고 외교관들까지 가담했다. 이들은 히틀러가 최대한 끔찍하게 살해당해야 일반 국민들이 반(反) 나치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다.

7월 20일 오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가 참석한 것과 다른 군사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늑대굴'에 폭탄가방을 들고 들어섰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동부전선 붕괴 상황에 대한 회의가 진행될 때 히틀러 옆으로 접근해 폭탄 가방을 최대한 히틀러와 붙여 놓고 회의실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히틀러 암살은 이날 히틀러 옆 좌석에 배석했던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폭탄 가방이 발에 걸리자 다른 쪽으로 치워 놓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폭발 지점이 멀어진데다 오크나무로 만든 회의용 테이블이 두꺼웠기 때문에 폭압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 것이다.

암살 계획이 실패하자 히틀러는 베를린 국민재판소장을 맡고 있던 롤란드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에게 지시하여 암살 모의자를 전부 체포해오도록 시켰으며, 이들은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베를린 내 플뢰첸체(Ploetzensee) 교도소에 수감됐다.

암살 세럭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일 정부와 군의 통제권을 나치당으로부터 뺏어오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성공할 경우 암살 세력은 최대한 빨리 서방 연합군과 평화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었다. 암살 세력이 어떤 식으로 평화 협정을 제안하려 했는지는 영영 밝혀지지 않았으나, 추측에는 해당 시점까지 독일이 점령한 유럽 영토는 인정받는 것으로 한 '비현실적인' 평화 협정을 제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발키리 작전'은 나치 독일 정권을 전복하려던 독일 내 저항 세력의 사실상 마지막 시도였다. 히틀러 암살이 실패하자 게쉬타포는 7,000명이 넘는 핵심 암살 기도 세력을 체포했으며, 그 중 4,980명을 처형했다.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은 암살이 성공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잠시 후 요제프 괴벨스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히틀러가 살아남았다고 방송하자 뒤늦게 모의가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잠시 후 사무실로 체포하러 온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체포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함께 암살을 모의한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상급대장과 함께 체포되어 약식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전속부관이던 베르너 폰 헤프텐(Werner von Haeften) 중위, 그리고 알브레히트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Albrecht Mertz von Quirnheim) 대령과 함께 총살대에 올랐다. 원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세 번째, 헤프너 중위는 그 다음에 총살당할 예정이었으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총살당하는 순간 헤프너가 그 사이에 뛰어들어 대신 총에 맞아 죽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다시 자신의 차례가 되자 "성스러운 독일이여, 영원하라!(Es lebe das heilige Deutschland!)"라고 외치며 죽었는데, 이것이 당시 들은 이에 따라선 "비밀의 독일이여, 영원하라(Es lebe das geheime Deutschland!)"라고 들은 이도 있어 그가 비밀 결사단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가 아니었냐는 도시 괴담이 오랫동안 떠돌았다.

그는 총살당했지만 이튿날 시신이 수습되었으며, 그간 수여받은 훈포장을 가슴에 단 채 SS에 의해 정중하게 화장됐다. 히틀러는 200여 명의 핵심인물이 총살, 교살 혹은 교수형으로 죽는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하게 한 후 나중에 직접 이를 지켜보았다고 알려지며, 이 7월 20일 암살모의사건을 이용하여 그간 탐탁찮게 보고 있던 정적들까지 한꺼번에 처리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암살 모의에 적극적으로 가담도, 반대도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자세를 보인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원수는 이 사건 후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음독자살을 강요 당해 청산가리를 탄 술을 마시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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