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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1938. 5. 4]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 바다 위에서 항해 중 사망

라마막 2023. 2. 9. 18:30

유도(柔道)의 창시자로 알려진 가노 지고로(嘉納 治五郎, 1860~1938)의 생전 모습.

그는 키가 작았지만 수년 간의 수련과 연습으로 기술을 연마한 뒤 한참 덩치가 큰 상대방도 손쉽게 뒤집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임종을 앞둔 자리에서 유언으로 '관에 넣을 때 검은 띠를 매지 말고 하얀 띠를 매게"할 것을 부탁했다. 그는 사범이기보다 영원한 수련자로 기억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근대 일본의 교육자이자 무술가. 사실상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일본 고유 무술인 '유도'를 창시했으며, 유도는 올림픽에서 채택된 첫 일본의 스포츠가 되었다. 그는 수련방식을 체계화하면서 '단(段)으로 부르는 단계적 계급방식(흰띠~검은띠 이후 1단~9단)을 고안했고, 이는 이후 가라데나 태권도, 카포에라, 검도 등 스포츠화 된 현대 무술이 모두 응용한 기본 교육체계로 자리 잡았다.

원래 지금의 고베지방 출신으로, 집안은 대대로 양조업을 했으나 양자였던 부친은 가업을 잇지 않고 사업을 했다. 교육의 힘을 믿은 부친 덕에 가노는 야마모토 치쿠운이나 아키타 슈세츠 같은 신(新) 유학자들로부터 교육 받았으며, 커서는 도쿄로 유학해 사립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장성해서도 키가 157cm에 불과했던데다가 '샌님' 이미지까지 있어 종종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던 중 전통 무술인 유술(柔術)이 자신에게 적합하다 판단하면서 유술에 매진했다. 1877년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한 가노는 학업과 유술 수련을 병행했으며, 1879년에는 대표로 선발되어 일본에 방문한 미국의 전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1885) 앞에서 유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유술을 보편화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가노는 단순히 상대방을 던지기보다는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 이 힘을 역이용해야 한다는 발상을 하면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던지는' 기술과 조르기 기술, 제압 기술 등을 키토류와 텐진 신요류 등에서 따오면서 새로운 형태의 무술로 정립했고, 이를 '유도'로 명명했다.

유도의 창시자라는 명성과 달리 그는 평생 직업 교육가였다. 그는 1889년부터 1901년까지 문부성(文部省: 문부쇼, 교육부 해당) 대신을 지냈고, 1900년부터 1920년까지는 도쿄에서 도쿄 고등사범학교장(현재의 오차노미즈 대학[お茶の水女子大学])을 지내며 유도와 검도가 공립학교의 기본 교육 과목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는 국제 올림픽협회(IOC)에 첫 동양인 회원으로 가입하여 1909년부터 1938년까지 위원을 지냈으며, 1912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이 참가한 모든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가노는 1934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특히 요로 결석이 심해지자 대외 활동을 중단했으며, 올림픽과 관계된 대외 활동만 간간히 했을 뿐이다. 그는 1938년 5월 IOC 회원 자격으로 해외 순방을 위해 출국했으나, 히카와마루(氷川丸)호로 항해 중 5월 4일, 바다 위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기록됐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식중독 사망설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의 군국화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기 때문에 당시 군부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의혹이 돌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는 나온 바가 없다.

그의 사후에도 유도는 계속해서 전파됐으며, 특히 195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어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처음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다시 등장했고, 이후 정식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그가 항상 마음에 둔 좌우명은 "精力善用 (최소의 힘을 사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낸다)"와 "自他共栄 (나와 타인을 위한 공생과 번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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