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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2. 12.] 스탈린그라드에서 퇴각하는 이탈리아군

라마막 2022. 11. 29. 17:21

 


1942년 12월, 소련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퇴각 중인 이탈리아군 병사들 뒤의 눈 덮인 들판에 얌전히 앉아있는 개 한마리의 모습.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막시밀리안 바이흐스(Maximilian Weichs, 1881~1954) 원수가 지휘하는 "B 집단군"이 주축으로 투입됐으나, 휘하에는 '독일 동맹군'인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군이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지오반니 메세(Giovanni Messe, 1883~1968) 대장이 지휘하는 제 8군이 투입됐고, 루마니아는 페트레 두미트레스쿠(Petre Dumitrescu, 1882~1950) 대장의 3군과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클랍스(Constantin Constanitinescu-Claps, 1884~1961) 중장의 4군이 전개됐다. 한편 이들과 별개로 크로아티아 역시 비테즈 구스즈타브 자니(Vitéz Gusztáv Jány, 1883~1947) 상장이 지휘하는 2군을 투입했다.

이들 전력은 훈련상태나 장비 면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열세였으므로, 독일군은 이들을 주력으로 삼기보다는 측방 방호나 후방 점령지 경계 등 부차적인 임무만 부여했다. 이들은 전쟁 중 사기도 낮은 편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저평가 받았지만, 실제로는 전선에서 능력에 비해 매우 선전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 '청색작전' 때에도 제 3 산악보병사단(라벤나)과 제 5보병사단(코세리아) 같은 경우 생각 이상으로 분투했다.

앞서 언급된 크로아티아 증원군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수립된 뒤인 1941년에 창설됐고, 6월자로 독일에 자원부대를 파견하기로 해 독일 제 100 경보병사단 휘하에 배속됐다. 하지만 워낙 훈련 상태나 군기가 엉망이었으므로 독일 측은 부대를 소규모로 깬 후 독일군 부대와 섞어 한동안 운용했으며, 그 과정에서 약 144명의 병사와 장교는 수준 미달 문제와 질병 등의 사유로 귀국시켰다.

이들은 로스토프 전투에 동계장비도 미비한 상태로 투입되어 사실상 한 차례 전멸당했으며, 1942년 7월에 생존자를 모아 다시 부대를 재건했다. 재건된 크로아티아 연대는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됐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보급부족에 따른 추위와 배고픔, 피로에 시달리며 서서히 녹아 없어졌고, 결정적으로 소련의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면서 독일 측방의 취약점으로 찍히면서 집중공격 당해 괴멸됐다. 이들 중 생존자는 독일 6군이 소련에 항복할 당시 1,000명의 부상자가 있었으며, 900명은 포로가 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소련은 이들 포로를 시베리아로 보냈지만 다시 유고슬라브 1여단을 창설하면서 자원병을 받았다. 시베리아에서 얼어죽기보다는 소련군으로 전향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인원이 이 여단에 참가했지만, 소련은 이들을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방패로 쓰면서 1년도 안되어 전투력이 40%가 소멸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들은 1944년 유고의 공산주의자 티토에게 인계됐지만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다시 이들을 전쟁 말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한 총알받이로 써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나마 생존한 이들은 유고에 정착했지만, 종전 후 이들은 소련의 세작 취급을 받던가 구 크로아티아의 패잔병 취급을 받았을 뿐이고, 그 누구도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주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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