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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9. 27] 미 해안수비대 유일의 명예훈장 수훈자, 더글러스 먼로 하사

라마막 2022. 11. 29. 17:08

생전의 먼로 하사 (USCG)

미 해안수비대(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 중 유일한 명예대훈장 수훈자인 더글러스 앨버트 먼로(Douglas Albert Munro, 1919~1942) 하사(Signalman First Class)의 모습.

 

그는 1942년 9월, 2차 마타니카우 전투에서 미 해병대 진지가 일본군에게 압도당하자 이들 해병을 탈출시키기 위해 투입됐다.

그는 히긴스 보트(Higgins Boat)를 조종해 해안까지 도달했으나, 해병대원들이 가득 탄 상륙정이 공격받게 되자 자신의 보트를 들이대 방패로 삼아 대신 기관총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향년 22세.

: 미국계 부친, 영국계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캐나다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가족은 곧 미국으로 이주해 워싱턴 주에서 자랐으며, 중부 워싱턴 교육대학교(Central Washington College of Education)에서 학업을 하던 중 2차세계대전 발발 조짐이 보이자 스스로 군에 입대했다. 그는 친구인 레이먼드 에반스(Raymond Evans, 1921~2013/해안수비대 중령 예편)와 항상 붙어다녀 "골드 더스트 트윈스(Gold Dust Twins: 1892년에 나온 입욕제로, 상표에 두 아이들이 어깨동무 하고 있는 로고가 있었음)"라는 별명이 붙었다.

교육이 끝난 뒤 그는 미해안수비대의 트레저리급(Treasury-class) 커터함인 스펜서(USCGC Spencer, WPG-36)함에 배속됐다. 1941년 12월, 미국와 일본이 개전하게 되자 미 해안수비대는 재무부 산하에서 해군부 산하로 이관됐으며, 이 때 먼로와 에반스는 미 해안수비대가 공격 수송함으로 배정한 헌터 리젯(USS Hunter Liggett, APA-14) 함에 승선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부터 참전했다가 문제의 2차 마타니카우 전투에 투입됐다. 1942년 9월 27일, 체스티 풀러(Lewis B. "Chesty" Puller, 1898~1971) 중령이 지휘에 따라 마타니카우 강 서측방의 일본군 진지를 급습하는 3개 중대에 배속됐다. 이 때 먼로는 2개의 전차상륙정(LCT)와 8대의 히긴스보트를 지휘해 해병대원들을 상륙지점까지 실어나르게 되었다.

잠시 후 미 해군 구축함 몬센(USS Monssen, DD-436)의 함포로 준비사격이 끝나자 먼로는 지시 받은 대로 부상자를 실은 보트를 모두 룽가 포인트까지 퇴거 시켰으며, 해병대는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언덕 위에서 고립되어 버렸다. 해병대가 포위 격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몬센 함은 127mm 함포로 일본군 진지에 사격을 해 간신히 해안까지 좁은 회랑이 하나 열렸다. 이에 풀러 중령은 해병대원들에게 "어떻게든 싸워서 해안까지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룽가포인트에서 대기 중이던 먼로는 해병대원들이 도달하면 모두 퇴각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 때 덱스터(Dexter) 중령은 먼로와 에반스에게 "혹시 퇴각작전을 한 번 지휘해보겠는가"라고 물었고, 먼로는 "당연하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먼로가 지휘하는 보트가 해안에 도달했으며, 먼로는 배에 실은 .3구경 기관포로 적 진지에 제압사격을 하면서 해병대원들을 태웠다.

해병대원들은 속속 먼로가 지휘해 온 상륙정에 탑승했으며, 먼로는 이들이 탑승하는 동안 방어할 목적으로 배를 상륙정과 적 진지 사이에 대고 방패역할을 했다. 이들 해병대원의 첫 탈출작전은 성공했으나, 상륙정 하나가 모래톱에 걸려 배가 빠지지 않았다. 이에 먼로는 다른 상륙정을 불러들여 배가 모래톱에서 빠지게 도와주라고 지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모래톱에 빠진 배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자신의 배를 그 사이로 몰아 작업 중이던 해병대원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먼로는 그 과정에서 총 한 발을 두개골 아래쪽에 맞았으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모래톱에 빠진 상륙정은 결국 빠져나가 퇴각작전이 재개됐다. 일본군 사거리 밖으로 나가자 먼로는 잠시 정신을 차렸지만, 그는 "상륙정은 탈출했나?"라고 물은 후 다시 기절했다. 에반스에 따르면,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항상 익숙하면서 내가 언제나 좋아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그리고 잠시 후 눈을 감았다."고 한다.

먼로는 1942년 9월 28일에 과달카날에 매장됐으며, 묘지에는 에반스가 급조해서 만든 십자가가 하나 섰을 뿐이었다. 작전이 완전히 종료되자 작전을 지휘했던 체스티 풀러 중령은 먼로 하사에 대한 명예대훈장을 상신했다. 이 훈장 상신안은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Jr., 1882~1959) 제독이 곧 재가했으며, 다시 1943년 5월 1일자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이 최종 승인해 수여가 확정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5월 24일, 먼로의 부모님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훈장 대리 수여식을 가졌다.

그의 시신은 종전 뒤인 1947년에 이장이 결정됐지만, 가족이 알링턴 국립묘지 매장을 거부해 고향인 워싱턴 주 클레 엘룸(Cle Elum)으로 이장됐다. 클레 엘룸 시는 1954년 그의 묘 양쪽 옆에 Mk.22 함정용 기관포를 양 옆에 설치했다. 훗날 그의 부모도 사망하게 되자 모두 아들의 묘 양 옆에 매장됐으며, 이 곳은 워싱턴 주에서 '워싱턴 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 중이다.

여동생이 한 명 있었으며, 오빠가 전사한 뒤 해안수비대 여성예비군(Coast Guard Women's Reserve)에 입대하려 했지만 체중미달로 거부됐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더글러스 셰헌(Douglas Sheehan)이 훗날 해안수비대에 입대해 중령까지 진급했다. 동료들에 따르면 먼로는 사망하던 당시 고향에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미 해안수비대 사령부 본부인 "더글러스 A. 먼로 해안수비대 본부빌딩"에 헌정됐으며, 오늘날 국립 해병대 박물관 내 '영웅의 벽(Wall of Heroes)'에 이름이 새겨진 유일한 비(非) 해병대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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