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2월 22일, 문 앞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있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
: 독일의 건축가로, 히틀러에게 중용받아 2차세계대전 내내 군수생산부 장관을 지냈다. 만하임의 중산층 집안 출신이며, 성적이 좋았지만 1923년에 발생한 초 인플레이션 사태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카를스루에(Karlsruhe)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이후 사정이 좀 나아지면서 뮌헨 기술대학교로 편입했다가 1925년에는 베를린 기술대학교로 옮겼으며, 이 곳에서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나우(Heinrich Tessenow) 문하로 들어갔다. 그는 1927년 테세나우의 조교가 되면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슈페어는 1931년 1월 나치당에 가입 신청서를 냈으며, 1931년 3월 1일자로 수리되어 474,481번 당원 자격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수입이 더욱 나빠지자 그는 테세나우의 조교를 관두고 나와 만하임으로 돌아왔으며, 이 곳에서 건축사무소를 열고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의뢰가 거의 들어오지 않자 곧 문을 닫았으며, 한동안 아버지가 운영하던 토지 재산 관리로 연명했다. 그는 1931년 7월 베를린으로 가 독일 총선을 앞두고 나치당을 도왔으며, 여기서 나치당 간부인 카를 항케(Karl Hanke)가 그를 눈여겨 봐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에게 소개했다. 괴벨스는 슈페어에게 나치당 베를린 당사 개축 공사를 맡겼으며, 이 일을 완수한 뒤에는 다시 만하임으로 돌아가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게 될 때까지 고향에서 지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새로 선전부가 설치되자 괴벨스는 이전에 일을 맡겼던 슈페어를 떠올려 다시 그를 고용했다. 여기서 슈페어가 설계안을 제출하자 당 수뇌부는 선뜻 확정을 못하다가 뮌헨의 히틀러 아파트로 슈페어가 직접 가서 설명을 하고 확정을 받아오라고 했으며, 이렇게 슈페어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만났다. 이렇게 선전부 건축 작업이 완료되자 히틀러는 슈페어를 '당 선전 및 홍보를 위한 예술 및 기술 책임관'이라는 자리에 앉혀 처음으로 공직에 진입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자 슈페어는 총리실 청사 건물 개수작업부터 시작하여 나치당이 일으킨 주요 건축사업을 도맡았으며, 원래 히틀러 역시 미술과 건축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총리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매일 건축 경과를 보고받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친해졌다. 사실상 히틀러의 '이너서클'에 들어간 그는 오전에 히틀러가 출근할 시 공관에서 나와 집무실까지 가는 동안 함께 걸으며 대화하거나 건축과 관련한 조언 및 보고를 했고, 대부분의 경우 히틀러와 함께 저녁을 들었다.
1934년 1월 21일, 나치 당 수석 건축가이던 파울 트루스트(Pail Troost)가 사망하자 슈페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첫번째 임무로 뉘른베르크의 제펠린 비행장 건축부터 맡았다. 이 곳에서 나치당 전당대회가 열렸으며, 그는 340,000명이 수용 가능한 초대형 건축물을 축조했다. 그는 건축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로 나치당기를 더욱 두드러지게 할 수 있으므로 행사를 밤에 치르도록 권유했다. 그는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쓰인 뉘른베르크 독일 스타디움 등 수많은 건축물을 책임졌으며, 히틀러의 취향에 맞춰 석조로 건물 외관을 장식했다.
1937년 1월, 슈페어는 히틀러에 의해 신 총통청사 건물 설계를 맡았다. 그는 일부러 히틀러 집무실까지 가는 길에 북에서 남으로 뻗은 축선이 400m 가까이 이어지는 회랑을 설치했다. 이 회랑은 방문자가 건물의 위엄에 압도당하도록 설계한 것으로, 실제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밀 하하 대통령은 불리한 상황에서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복도를 지나가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42년, 슈페어는 히틀러 직권으로 제국 군수장관에 임명됐다. 독일은 전쟁 중기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국가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였는데, 히틀러의 최측근이던 그는 이런 권위를 이용하여 흩어져 있던 생산 책임을 모으고 통합하며 생산성을 올렸다. 일각에서는 그가 입맛에 맞는 통계자료를 갖다 댔기 때문에 생산성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히틀러를 호도했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이미 1930년대 바이마르 때부터 시작된 여러 개혁사업이 이 때부터 제대로 작동한 결과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찌됐던 그는 가시적으로 군수생산을 끌어올려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고, 독일 역시 1945년까지 계속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밝혀지겠지만, 그는 전쟁포로와 민간인 포로 등을 독일 군수품 생산에 강제 동원하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는 그가 목표를 위해선 도덕성 따위는 눈감을 수 있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4년 중후반부터 독일의 생산력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하지만 슈페어는 훗날 이것이 자신의 실패가 아니라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시설 가동에 차질이 발생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5년으로 넘어가며 패전이 목전에 다가오자 히틀러는 독일의 공업시설을 대부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슈페어는 이를 이행하는 대신 독일 수뇌부 관리들을 설득해 반대로 이를 보존했다.
슈페어는 1945년 4월 22일,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벙커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는 파괴된 총리실 건물을 돌아본 후 함부르크로 탈출했다. 4월 29일, 히틀러는 자살을 하면서 후계 내각을 발표했으나 의도적으로 슈페어를 내각에서 뺐고, 그의 부하였던 카를-오토 사우어를 대신 군수장관에 앉혔다. 하지만 슈페어는 히틀러 사후에 성립된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직접 찾아가 참여의사를 밝혔고, 수장이던 카를 되니츠 원수는 그를 다시 군수 생산부 장관에 앉혔다. 하지만 그는 전쟁 말까지 이 자리에서 연합군과 내통하면서 독일군 자료를 넘겼으며, 5월 23일에 정식으로 영국군에 체포되면서 나치 정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어 24건으로 기소됐으며, 그 중 전쟁범죄와 반인류범죄, 노예노동 강요 등에서 혐의가 확정되어 20년형을 받았으나 간신히 사형은 면했다. 그는 20년 형기를 모두 채운 뒤 1966년에 석방됐으며, 투옥 기간 중 두 권의 자서전을 써 석방 뒤에 출판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제3제국의 중심을 내부에서 바라본 드문 내용이었으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8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죽을 당시 몇 건인가 건축 설계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제대로 남은 것은 없다.
그는 자서전과 말년의 인터뷰를 통해 나치에 협력했던 과거가 부끄러우며 후회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유대인 학살 같은 나치의 범죄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가 뒤늦게 알고 진심으로 이들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말년의 이런 언급은 '이미지 세탁'에 불과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물론 그가 능력있던 인물임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전후 연구를 통해 그는 '최후의 해결책(유대인 학살)' 같은 나치 범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증거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섯 자녀가 있었으나 1933년 이후 가족들과 소원했으며, 심지어 1966년 출소 후에도 가족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 외롭게 죽었다. 그의 장남인 알베르트 슈페어 주니어 역시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201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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