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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11. 5] 라바울 전투를 위해 출격 중인 미 해군 조종사들

라마막 2022. 12. 2. 16:20

디지털 채색: DB Colour

항모 비행갑판에서 각자 자신의 항공기로 이동 중인 미 해군 조종사들의 모습.

앞쪽부터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헨리 디어링(Henry H. Dearing) 중위, 텍사스 주 휴스턴 출신의 찰스 밀러(Charles W. Miller) 소위, 캘리포니아 주 산 마테오 출신의 버스 알더(Bus Alder) 중위이며, 이들은 새러토가(USS Saratoga, CV-3) 항모에 수납된 그루먼(Grumman) F6F-3 "헬캣(Hellcat)"기로 걸어가고 있다.

이 사진은 1943년 11월 5일에 촬영된 것으로, 이 세 조종사는 일본 해군 함대와 교전 중이던 어벤저(Avenger) 뇌격기와 돈트리스(Dauntless) 급강하폭격기를 엄호하기 위해 출격하고 있었다.

1943년 11월 5일, 연합군 태평양사령부는 파푸아 뉴기니 인근 라바울(Rabaul)에 일본 해군 순양함이 집결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가장 인근에 있던 새러토가 항모의 함재기가 긴급 출격하여 겹겹이 방어 중인 라바울 항을 돌파한 뒤 일본군 순양함 대부분을 반파했으며, 이를 통해 부겐빌(Bougainville)에 가해지던 일본 수상함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다. 새러토가 항모 역시 전투 후 무사히 해역에서 이탈했다.

: 라바울은 1943년 초까지만 해도 태평양 전쟁의 전장에서 거리가 멀었으나, 연합군이 서태평양 지역에서 카트윌 작전(Operation Cartwheel)을 실시하면서 핵심 전장터가 되었다. 이 작전은 연합군이 일본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던 라바울을 항공기의 기습폭격으로 고립시킨다는 내용이었으며, 당시 일본 육군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철수하면서 과달카날(Guadalcanal), 콜롬방가라(Kolombangara), 뉴 조지아(New Georgia)와 벨라 라벨라(Vella Lavella)를 포기하고 있었으므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됐다.

라바울 섬은 뉴 브리튼(New Britain) 제도의 일부로, "남태평양의 진주만"이라는 별명이 있던 곳이다. 이 섬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뉴기니에서 보유하고 있던 두 개의 주요 항구 중 하나가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1942년 2월경 이 섬을 점령했으며, 이후 솔로몬 전투와 뉴기니 전투를 실시하면서 전역 내 근거지로 활용했다. 일본군은 이 곳 내 5개 활주로에 총 367개의 대공포를 설치했으며, 육군은 그 중 192개, 해군은 175개를 통제했다.

카트윌 작전은 1943년 가을부터 단행됐으며, 미 제 5공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왕립 뉴질랜드 공군이 작전에 투입되었고 사령관으로는 미 육군항공대의 조지 케니(George C. Kenney, 1889~1977) 대장이 선임됐다. 작전 시작 후 1943년 10월 12일자로 미군은 349기의 폭격기를 투입해 라바울 항을 폭격했지만, 이후 기상이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작전적 기세를 잇지 못하고 중단됐다. 다시 18일에 기상이 조금 나아지자 50대의 B-25 미첼(Mitchell) 중폭격기가 라바울을 폭격했지만 다시 기상이 악화되어 작전이 끊겼으며, 10월 23일부터 다시 날씨가 개이자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작전이 진행됐다.

미군은 11월 2일, B-25 75대로 구성된 총 9개 폭격대대와 P-38 라이트닝(Lightning) 80대로 구성된 6개 전투비행대대를 라바울에 전개해 심슨(Simpson)만(灣)과 대공방어시설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8대의 B-25가 일본군 대공포와 해군 함재기에 격추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제 3 공격단에 소속되어 있던 레이먼드 윌킨스(Raymond H. Wilkins, 1917~1943) 소령은 기체가 격추당해 추락하는 와중에도 공격받는 아군기들을 엄호하다 그대로 바다에 충돌해 전사했다. 윌킨스 소령에게는 사후 명예대훈장이 추서됐다.

한편 부겐빌을 완전히 점령해 이 곳에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던 남태평양 사령관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1882~1959) 제독은 부겐빌 남쪽 끝에 일본군 활주로가 두 개 있는 것을 보고 이 곳을 점령하기로 했으며, 14,000명의 미 해병대원으로 상륙작전을 단행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엠프레스 어거스타(Empress Augusta) 만에 병력을 상륙시킨 후 부겐빌 서안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곧장 미 해군 건설대대(시비즈[Sea Bees])를 투입해 미군 자체 활주로를 건설하고자 했다.

미 해군은 엠프레스 어거스타 만까지 진출했지만 일본군의 고가 미네이치(古賀峯一, 1885~1944) 제독은 트루크(Truk)에 있던 일본 해군 순양함을 모조리 긁어 모아 이 곳에 집결시켰다. 이 전력은 일본 해군이 예비로 빼놓고 있던 함정들이었으나 라바울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급한대로 강제 투입한 함정들이었다. 할시 제독 역시 일본군의 순양함이 집결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에 대응할 충분한 함정이 부족하자 정면대결을 피하기로 했다. 당시 남태평양 사령부에는 2대의 전함과 순양함 몇 대가 있었을 뿐이며, 그나마도 곧 있을 타라와 전투 지원을 위해 여기저기서 모아온 상태였다. 그나마 그가 믿을 수 있던 전력은 그가 보유 중인 2척의 항모(새러토가/프린스턴)에 항모비행단 정도였다. 문제는 이 함재기들은 해전이 벌어질 경우 함대를 방어해야 하는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지금 라바울에 투입한다면 일본군의 치밀한 방공망 때문에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해병대가 부겐빌에 상륙한 상태에서 일본 순양함이 집결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겐 선택이 없었으며, 훗날 할시 제독은 이 상황이 "남태평양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겪은 가장 처절한 위기 상황"이었다고 술회했다.

결국 할시 제독은 상륙전력 지원을 위해 프레드릭 셔먼(Frederick Sherman, 1888~1957) 소장의 지휘로 항모 두 척을 라바울 인근까지 이동시켰으며, 셔먼 제독은 기상이 약간 좋지 않은 틈을 타 97대의 함재기를 모두 출격 시켰고, 함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항공기도 남겨놓지 않았다. 이들 항공기는 일본군 수상함을 격침시키는데 집중하기보다 최대한 많은 수의 함정에 피해를 입힐 것을 명령 받았다. 미 해군은 이 97대의 항공기를 증원하기 위해 바라코마(Barakoma)와 최근 점령함 벨라 라벨라에 주기 중이던 함재기 전력까지 모두 출격시켜 셔먼 제독의 공세세력과 합류하도록 했다.

미 해군의 공격이 이루어진 지 한 시간 뒤, 58대의 P-38 라이트닝의 호위를 받은 미 제 5공군 소속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중폭격기 27대가 도달해 폭격을 이어갔다. 이들의 공격이 끝날 무렵에는 라바울에 집결 중이던 일본군 순양함 7척 중 6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그 중 네 척은 중파된 상태였다. 그 중 중순양함 아타고(愛宕)는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 당해 22명의 수병과 함장이 전사했으며, 순양함 마야(摩耶)는 폭탄 하나가 엔진실을 때려 유폭 하면서 70명의 수병이 전사했다. 중순양함 모가미(最上)함은 500파운드 폭탄 하나가 화재를 일으켜 19명의 수병이 전사했고, 순양함 타카오(高雄)함은 두 발의 폭탄이 직격해 23명의 수병이 전사했다. 그 와중에 순양함 치쿠마(筑摩)는 아슬아슬하게 폭탄이 모두 비껴가 비교적 온전했던 반면, 경순양함 아가노(阿賀野)는 갑판 위 대공포에 폭탄 한 발이 떨어져 수병 한 명이 전사했다. 그 외에 세 척의 구축함은 모두 경미한 피해만 입고 끝났다.

이 날의 기습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고가 제독의 함대가 더 이상 부겐빌 작전에 위협을 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미 제 5공군은 이튿날 재정비 후 다시 출격해 한 바퀴를 돌며 공세를 이어갔으며, 결국 일본 측은 살아남은 함정을 모두 트루크로 퇴거했다. 반면 미 해군/육군항공대 항공기가 입은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이틀 뒤, 미 제 5함대 소속 제 50.3 기동함대의 항모가 11월 7일자로 이 곳에 도착했으며, 새로 취역한 에섹스(USS Essex, CV-9) 항모와 벙커힐(USS Bunker Hill, CV-17) 항모, 그리고 경항모 인디펜던스(USS Independence, CVL-22)함이 이 곳에 추가됐다. 할시 제독은 추가된 전력을 모아 11월 11일에 라바울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한편, 중파 상태라 미처 트루크로 퇴각하지 못한 일본 해군 경순양함 아가노 함은 이 곳에 남아있다가 어뢰와 폭격으로 집중 난타를 당했고, 구축함 스즈나미(涼波)함은 라바울 만 입구에서 어뢰를 재장전하던 중 폭탄 한 발이 직격해 선내에서 대폭발을 일으키고 148명의 수병과 함께 침몰했다. 일본 역시 웨이크(Wake) 섬 방면에서 12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미 해군 항모를 노렸지만 중간에 요격당해 35대의 항공기만 잃고 모두 돌아갔다.

사실 일본은 라바울을 역내 주 거점화 하고 있었지만 보급이 워낙 어려운 곳인데다 주변 섬들과 이격 거리가 커 방어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 전투로 연합군은 라바울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으며, 남태평양 지역의 일본 해군 거점을 없애 버림에 따라 작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특히 부겐빌과 부카(Buka)를 점령한 미 해군과 해병대는 남태평양 지역에 처음으로 든든한 육상기지를 설치할 수 있었고, 1943년 12월부터 본격적인 태평양 도서지역 점령작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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