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625전쟁사

[1950. 10]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노획한 제 27 영연방 여단

라마막 2022. 12. 25. 11:20

195010월 경, 현재의 북한 지역 어딘가에서 영국 육군 제 27보병여단 병사들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노획한 뒤 찍은 기념 사진. 정확한 장소는 특정되지 않는다.

: 영국 제 27보병여단은 현재는 해편된 부대이며, 당시 예하에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군이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제 27 영연방 여단(27th British Commonwealth Brigade)였다.

27여단은 1914년에 제 9 스코틀랜드 사단 예하부대로 첫 창설했으며, 1차세계대전 발발 후 편성된 자원여단 중 하나였다.특히 이 부대는 '킷체너(Kitchener) 공의 군대'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유럽 서부전선에서 싸우기 위해 호레이쇼 허버트 킷체너 백작(Horatio Herbert Kitchener, 1st Earl, 1850~1916/육군 원수)이 창설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창설 당시 27여단 예하에는 제 11, 12 왕립 스코트 대대와 제 6 왕립 스코트 소총대대, 그리고 제 10 아길(Argyll) 및 서덜랜드 하이랜더(Sutherland Highlanders) 대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27여단은 1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해체됐으나, 1939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재창설 되어 제 27 보병여단이 되었다. 다시 제 9 하이랜드 보병사단 예하에 편성된 27여단은 프랑스 전선에 있던 제 51사단이 독일에 항복하자 9사단이 51사단으로 재 지정되면서 27여단 역시 함께 51사단 예하로 들어갔다. 이들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 북서부 유럽 등지에서 싸웠으며, 종전과 함께 또 한 번 해체됐다.

여단이 두 번째로 재창설 된 것은 1948년으로, 최초에는 영국령 식민지인 홍콩으로 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파병 준비가 끝날 무렵인 19506월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여단은 홍콩 대신 한국으로 파병됐다. 이들은 19508월부터 대령에서 준장으로 가()진급한 베이즐 코드(Basil A. Coad, 1906~1980) 장군의 지휘 하에 6.25 전쟁에 투입됐으며, 최초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어 부산지역을 방어했다.

1950829, 일본에서 집결한 국제연합(UN)군 전력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혀있던 UN군은 상륙부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방어선 밖으로 진격했다. 27여단 역시 19509월부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 3대대와 함께 북진을 시작했으며, 195012월에는 캐나다 패트리샤 공주 경보병 연대 2대대와 합류했다. 이 진격 시기에 27여단은 다른 영연방 부대와 달리 지원부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싸웠으며, 항상 열세의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다 보니 미군 의존도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27 영연방 여단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해 겨울 공세를 시작하자 압록강 퇴각작전을 개시했으며, 19511월에 벌어진 3차 서울 전투를 치른 뒤 남쪽으로 퇴거했다. 19511, UN군이 역습을 개시하자 1월부터 왕립 뉴질랜드 포병대 예하 16 야전포병연대가 지원되면서 27여단 역시 역습에 참가했으며, 2월에는 캐나다 보병대대가 신규로 예하에 편성됐다.

27 영연방 여단의 마지막 전투는 1951422~25일간 치러진 가평 전투로, 여단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처절한 전투를 치른 끝에 공산군을 상대로 간신히 승리했다. 전투 후 참가 부대의 피해를 평가한 영국군은 아길(Argylls) 및 미들섹스(Middlesex) 연대를 진지교대 시켰으며 27여단은 해체한 후 제 1 영연방사단 예하 28 영연방 여단에게 섹터를 맡겼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