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인물인 정봉욱(鄭鳳旭, 1924~2018) 중좌는 유일하게 전쟁중 북한군 좌관급 장교가 국군에 투항한 뒤 국군 장교로 임관한 사례다. 그는 원래 북한 인민군 제 13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포병장교였다. 그는 당번병 하나와 함께 하루 전 날인 8월 21일에 미 제 25사단 27연대에 투항했다가 국군 제 1사단에 인계됐다.
황해도 안악군 태생. 일제시대 때 태어나 중국국민혁명군 제 18집단군, 혹은 공산군 예하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했으며, 평양 군관학교를 거쳐 인민군 포병으로 임관했다. 6.25가 발발했을 당시에는 전연군단인 인민군 1군단 예하 13사단 사단 포병대에 소속되어 참전했다.
북한 인민군 1군단은 개전과 함께 남침을 시작한 후 강원도를 거쳐 빠르게 남진했으며, UN군은 열세의 전력으로 증원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전을 치르려면 전선을 좁혀야 한다고 판단한 미 제 8군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의 결정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이렇게 1950년 8월까지 낙동강을 연한 전선이 형성됐다.
8월 22일, 인민군 13사단은 신주막 방면에서 국군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미군의 포격과 항공 지원으로 그 자리에서 돈좌된 상태였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인민군 13사단장인 최용진(崔勇進, 1916~1999) 소장은 포병대대장인 정봉욱 중좌를 불러 포병 대응이 실패하고 있다면서 공세 실패의 책임을 돌리는 질책을 했다. 당시 인민군 포진지에서 국군 1사단까지 거리가 10km에 불과해 사거리가 짧았고, 포 진지를 전방 추진 했다간 근접항공지원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 정 중좌의 포병대는 인근 과수원에서 포병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사단장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발언을 하자 그 자리에서 항의해 격렬한 언쟁이 붙었고, 결국은 사단장이 자신에게 공세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투항을 결심했다.
그는 곧 당번병만 한 명을 대동하고 13사단과 마주보고 있던 미 제 25사단에 항복했다. 그는 투항 후 과수원에 은폐 중이던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의 위치를 모두 UN군 측에 넘겼으며, 이들 포병대는 곧 미군 야포의 집중 사격을 받고 괴멸됐다. 그 외에도 그는 다부동 지역 작전지도 등을 챙겨와 국군에 넘김으로써 한-미 연합군이 다부동 지역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귀순 후 그는 국군 편입을 희망했으며, 국군은 이를 받아들여 특임(특별임관)장교로 임관 시키고 중령 계급을 주었다. 인민군의 구조나 내부에 대해 익숙하던 그는 전쟁 기간 내내 대한민국 육군 포병장교로 활약했으며, 1953년 5월, 육군 제 3군단이 창설됐을 당시 군단포병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이 시기에 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만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소장과의 인연으로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자 혁명군에 가담했다.
그는 1965년 준장으로 진급해 육군 제 7보병사단("칠성부대") 사단장에 임명됐다. 사단장 재임 중이던 1967년 4월 12일, 7사단 섹터 내의 205GP가 북한군 침투조의 공격을 받자 정 장군은 직접 사단 포병연대를 동원해 포격으로 대응했으며, 수복한 GP 위로 올라가 북한 측 사단장과 연대장 이름을 호명하며 다시 도발한다면 북한군 진지에 직접 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 상대방 지휘관들은 정봉욱 장군이 북한에 있던 시절 후배 장교들이었는데, 서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있던 사이였으므로 GP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는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68년에 처음 개교한 육군 제3사관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1970년에 육군 훈련소장을 역임한 뒤 1973년 소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예편 뒤에는 1978년까지 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사실 그는 팔로군에 북한 인민군 출신이긴 하나, 투항 후 평생 완고한 반공 성향을 유지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했고,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소박한 인물이라 지휘관 생활을 하면서 부대 내 부조리와 비리 척결에 힘썼다. 스스로도 비리나 부패를 경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인이 사적으로 지휘 트럭을 사용하자 크게 화를 내면서 외양간에서 자라고 쫓아낸 일화가 유명하다. 이는 국공내전을 직접 보면서 국민혁명군과 팔로군의 사례로 지휘부의 부패상이 군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본 경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봉욱 장군은 최초 인민군의 최용진 13사단장의 추궁을 받았을 때 "잘못하다간 책임을 뒤집어 쓰고 죽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정치군인들이 항상 야전 군인들을 감시하고 있는 공산군 특유의 군 구조도 평소 굴욕적이라고 느껴왔기 때문에 투항을 결심했다고 훗날 밝혔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군 생활을 마친 뒤 조용히 노년을 보내다 2018년에 타계하여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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