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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5] 장진호 전투를 버텨낸 미 해병대의 전설, 체스티 풀러 장군

라마막 2022. 12. 23. 12:05

1950 년  9 월 중순 ,  미 제  1  해병사단  1  여단 여단장인 루이스  " 체스티 "  풀러 (Lewis 'Chesty' Puller, 1898~1971)  대령이 인천과 서울 사이의 도로 중 한 곳에 앉아있는 모습 ( 첫번째 사진 ).

체스티 풀러 장군은 미군에서 역사상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실전 공적 검증이 되어야만 수여 되는 해군 십자 훈장만 다섯 개를 받았고, 우수근무십자훈장까지 하나가 있어 "십자 훈장"만 여섯 개를 보유한 인물이다. 역사상 십자훈장 수가 그보다 많은 인물은 1차세계대전 중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참전해 적기 26기를 격추 한 에디 리켄벡커(Edward Vernon Rickenbacker, 1890~1973) 대위 뿐이다.

버지니아 주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VA) 태생. 부친을 열 살에 여의고 홀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부터 남북전쟁 이야기에 심취해 특히 토머스 '스톤월' 잭슨(Thomas 'Stonewall' Jackson, 1824~1863) 장군에게 매료됐다. 처음에는 미 육군에 입대해 1916년 미-멕시코 간 국경 전쟁(The Border War)에 참전하고 싶어 했으나, 아직 부모 동의가 필요한 나이였던 데다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아 입대하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버지니아 사관학교(VMI: Virginia Military Institute)에 입학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1918년에 학교를 관뒀고, 관두면서 "총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벨로 우드(Belleau Wood) 전투에서 전과를 남긴 미 제 5 해병사단 이야기를 듣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패리스 섬(Parris Island)의 해병 모병소로 가 입대를 신청했다. 당시 미 해병대는 한창 소규모 군대에서 팽창 중이었으므로 그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뒤 부사관 학교로 추천을 받았으며, 다시 수료 후 장교후보반(OCS: Officer Candidates School)에 추천받아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서 교육 받았다. 그는 1919616일에 해군 예비군 소위로 임관했으나, 불과 10일 후 1차대전 종전에 따른 감군 조치로 예비역으로 전환됐을 뿐 아니라 계급도 상병으로 강등됐다.

상병이 된 풀러는 다시 아이티에서 분쟁이 터지자 소위로 환원되어 반군 제압 작전을 실시했으며, 1922년에는 훗날 제 18대 해병대 사령관이 되는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Alexander Vandergrift, 1887~1973) 소령의 부관이 되었다. 그는 아이티 작전 후 가() 진급 상태에서 정식 소위로 임관했으며, 잠시 하와이에서 근무 후 1928년에는 니카라과로 파병 됐다. 이 때까지 그는 아이티와 니카라과에서 게릴라를 상대로 싸우며 전투 경험을 쌓았고, 그 전공으로 해군 십자훈장도 두 개나 수여 받았다.

니카라과 근무 뒤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북경 미 대사관 경비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잠시 어거스타(USS Augusta, CL-31)에 보직 되어 함장이던 훗날의 태평양 사령관 및 해군참모총장인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1885~1966) 대령과 친분을 텄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미 제 7해병사단 예하에 신설 부대로 창설한 3해병여단에 보직 됐으며, 194258일 사모아(Samoa) 방어전을 시작으로 처음 전장에 투입됐다. 풀러 중령은 다시 1942918일에 1 해병사단과 함께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에도 투입됐다.

체스티 풀러 중령은 과달카날에 도착하자 대대를 지휘하여 마타니카우(Matanikau) 전투에 투입되어 전멸 직전이던 세 개의 중대를 구출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풀러는 해안으로 부대를 이동시킨 후 미 구축함에 신호를 보내 지원사격을 받는 사이 탈출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이후 다시 과달카날에 재 투입된 그는 핸더슨 활주로 전투에서 활약하며 세 번째 해군 십자훈장을 받았다. 풀러 중령은 1942118, 전투 중 지휘소를 기습당해 백병전을 벌이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됐지만, 1118일에 다시 회복되어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후 7 해병연대 행정장교로 보직 되어 글로체스터(Gloucester) 만 전투를 지휘해 네 번째 해군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19442월에는 미 제 1해병연대장으로 보직됐다. 그는 펠렐리우 전투를 치르면서 해병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전투 후 첫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여 받았다. 이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3,000명 중 1,749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적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자 상급부대인 1해병사단장이 직접 연대가 전멸하기 전에 그의 부대를 전선에서 빼냈다.

한편 그의 동생인 새뮤얼 풀러(Samuel D. Puller) 역시 미 제 4 해병연대 행정장교로 참전 중이었는데, 그는 1944년 여름 괌(Guam) 전투 중 일본군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었다.

전후 그는 캠프 르준(Camp Lejeune)에서 보병 훈련연대장을 역임했으며, 다시 그 후에는 뉴올리언스 제 8 예비군구 국장과 진주만 해병주둔지 사령관을 역임했다.

2차대전 중 촬영된 체스티 풀러 대령의 모습/디지털 채색


그러던 중
1950625일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미 제 1 해병연대장으로 보직됐다. 그는 1950915'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처음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 작전의 성공으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915일부터 112일까지는 인천-서울 간의 인민군 잔적을 격멸 했으며, 38선을 돌파해 북한 지역에 진입하면서 UN군의 북진을 이끌었다. 그는 1129일부터 124일까지 북진을 이끄는 과정에서 다섯 번째 해군 십자훈장과 두 번째 공로훈장을 받았다.

1950125, 그의 연대는 한만 국경 인근까지 도달했으나 중국군이 '인민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면서 교두보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던 UN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 인근으로 퇴각해 1210일까지 통칭 "장진호 전투"를 치렀으며, 이 전투 중 그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참 동안 적을 찾아 헤맸다. , 드디어 적을 찾았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 덕에 얼마나 문제가 단순해졌는가?!"

19511, 풀러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미 제 1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보직됐다. 하지만 224일에 미 제 9군단장인 브라이언트 무어(Bryant E. Moore, 1894~1951) 소장이 여주 인근에서 헬기 사고로 순직하자 해병 1사단장이던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1893~1977) 소장이 9군단장으로 이동했고, 풀러 준장이 1 해병사단장 대리가 되어 19513월까지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그 직후인 1951520일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캘리포니아 주 캠프 펜들턴의 미 제 3해병사단장과 캘리포니아 주 코로나도의 태평양 보병훈련소장을 지낸 그는 19539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547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2 해병사단 부사단장을 지내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가 와 1955년 말에 전역을 선택했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그가 전역하기 직전인 1955111일자로 그의 진급을 결정해 풀러 장군은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의 아들인 루이스 풀러 주니어(Lewis B. Puller, Jr., 1945~1994) 역시 미 해병대 장교로 임관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했으나, 전투 중 지뢰를 밟아 두 다리와 한쪽 손 일부를 잃었다. 주변인들 증언에 따르면, 풀러 장군은 이 때 처음 아들의 병상에 찾아가 침대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아들인 풀러 주니어는 1992년 자서전인 <운 좋은 아들: 어느 베트남 참전 용사의 회복기(Fortunate Son: The Healing of a Vietnam Vet)>를 써 퓰리처 상을 수상했으나, 1994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풀러 장군의 딸은 VMI 출신으로 대령까지 진급한 윌리엄 데브니(William H. Dabney, 1934~2012)와 결혼했으며, 데브니 역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해병 26연대 3대대 예하 소대장으로 1968414일까지 근무했다. 그는 미군이 77일간 포위전을 버틴 케산(Lhe Sanh) 전투에 참전해 881고지를 방어한 공로로 해군 십자장을 받았으나, 훈공장을 싣고가던 헬기가 추락해 훈장이 제대로 수여 되지 못하다가 2005415일에 가서야 재수여 됐다. 풀러 장군은 또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1885~1945) 장군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풀러 장군은 생전 다섯 개의 해군 십자 훈장과 미 육군우수근무십자훈장을 받았고, 육군으로부터 은성 훈장 한 개, 항공 훈장 두 개, 동성 훈장, 공로 훈장 두 개, 대통령 부대 표창 4,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 1, 해병 원정 훈장 2개 등 다수의 훈장을 수상해 미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기록됐다. 그는 만년을 버지니아 주 살루다(Saluda, VA)에서 지냈으며, 19711011일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강인한 정신과 단단한 이미지는 해병대 문화에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미 해병대 훈련소에서는 하루 일과를 끝낼 때 "어디 계시든 좋은 밤 되십시오 체스티! (Good night Chesty, wherever you are!)"라는 구호로 마감하며, 동기들의 용기를 북돋을 때도 "체스티 풀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Chesty Puller never quit!)"를 구호로 사용한다고 한다. 해병 OCS 과정에서도 군가로 <체스티 풀러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It was good for Chesty Puller, and it's good enough for me)>가 쓰이고 있으며, 현재에도 미 해병대는 푸쉬업 등을 할 때 서로 격려를 하면서 "체스티를 위해 하나만 더(do one for Chesty)!!"를 쓰고 있다. , 그의 이름은 해병의 긍지이자 사기의 근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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