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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0. 10] 6.25 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에이스,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대위

라마막 2022. 12. 8. 18:03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대위 / Public Domain

소련 공군의 에이스인 세르게이 크라마렌코(Sergey Kramarenko, 1923~2020) 대위의 모습. 사진은 그가 소련 공군 제 324 전투항공사단 예하 176 호위전투항공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 촬영한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부터 참전했으며, 1951년 4월~1952년 1월까지 북한에 파병되어 총 15대의 UN군 항공기를 격추해 에이스가 되었다.

: 소련의 '인민영웅' 칭호를 받은 에이스 조종사. 소련이 배출했던 '마지막' 에이스였으며, 2차 세계대전과 6.25 두 전쟁 참전 후 1970년대에는 이라크 공군과 알제리 공군 자문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소련군에서 공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인 칼리노프카(Kalinovka) 태생으로, 부모가 어려서 이혼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따라 코카서스 지방으로 이주해 살다가 성장한 뒤 볼가강 인근 콜크호츠(Kolkhoz)에서 살았다. 그는 1930년대 소련에서 공군 조종사 모병을 시작하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조종사를 지망했으며, 1940년 항공 클럽에서 비행 시간을 채우기 시작하다가 해당 클럽에서 단 80명만 소련 공군 조종사로 선발할 때 포함되었다. 그는 1941년 4월 1일부터 조종교육을 시작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일선에 배치됐다.

그는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처음 전장에 투입됐다. 제 523 전투항공연대에 소속된 그는 LaGG-3 항공기에 탑승했으며, 1943년에 다시 라보츠킨(Lavochkin) La-5로 기종을 변경 받은 후 본격적으로 전투에서 활약을 시작해 독일군의 Fw-190과 Bf-109를 상대로 싸웠다. 하지만 그는 1943년 2월 23일이 되서야 독일군의 Ju-87 스투카(Stuka)를 상대로 첫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크라마렌코는 1944년 3월 19일, 독일군의 Ju-88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호위 중인 Bf-110 여섯 대와 교전에 들어갔다. 크라마렌코 편대의 편대장인 바펠 마슬리야코프(Pavel Maslyakov)가 Bf-110 한 대를 격추했지만 곧 꼬리를 물리자 크라마렌코가 지원하기 위해 따라 붙었고, 곧 Bf-110 한 대를 격추했지만 다시 그 뒤에 따라온 Bf-110에게 격추당했다. 크라마렌코는 긴급하게 사출했지만 항공기에 이미 불이 붙어 있었으므로 얼굴과 손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곧 무장친위대(SS)에 인계됐지만 크라마렌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SS는 그를 처형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 직전에 어느 독일국방군 장성이 크라마렌코의 처형을 중단하도록 명령한 뒤 야전병원으로 이송하도록 했으며, 병원에서 치료받기 시작한 지 두 주 차에 이 병원을 소련군이 접수했기 때문에 그는 포로 상태에서 풀려났다.

크라마렌코가 다시 전쟁터 위를 날게 된 것은 1950년 10월 초, 소련 제 176 전투항공연대가 소련에 투입되면서 였다. 크라마렌코는 긴급하게 장교 클럽으로 소환됐으며, 이 자리에는 스탈린의 둘째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Vasily Stalin, 1921~1962)도 함께 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 정부는 북한 지역에 미 공군 B-29 중폭격기가 투입되어 북한의 도시를 폭격하고 있지만, 정작 항공력이 빈약한 북한 공군이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 소련의 지원을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소련은 조종사들이 자원한 형태로 하여 북한에 공군 전력을 전개했으나, 이 사실은 이후 냉전이 끝날 때까지 비밀에 붙여졌다.

소련 공군은 최초 중국의 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후 중국 인민의용군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곳에서 MiG-15로 기종 전환 교육을 받고 공중전 연습을 치른 소련 공군은 묵덴(셴양[ 沈阳]의 다른 이름) 공군기지에서 마지막 점검 후 단둥(丹東)의 중국군 공군기지로 이동하여 항공기도 중국군 마크로 재도색했다. 소련 제 324 전투항공사단은 1951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6.25 전쟁에 개입했다.

항공사단은 참전 첫 날인 4월 3일 하루동안 격추전과 없이 3대 피격추만 당했으나, 이튿날 처음으로 F-86 한 대를 격추한 후 미군 조종사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과는 계속 미군에게 밀리는 형태였는데, 크라마렌코는 훗날 그 이유를 "미군 항공기의 성능이 우월했고, 소련이 더 높은 고도에서 전장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크라마렌코는 4월 12일에 첫 격추를 기록했다. 그는 이 날 미 공군의 A.B. 스완슨(A.B. Swanson) 대위가 조종하는 F-80C 한 대를 격추했으며, 이어서 6월 2일에 두 번째 적기를 격추했다. 그는 총 104회의 전투 임무를 소화했으며, 42대의 UN군 항공기와 조우했고 1952년 1월 17일까지 총 15대의 UN기(미 공군기 13대, 호주 공군기 2대)를 격추했다. 전후 쌍방의 공식자료를 토대로 비교한 바에 따르면 그는 3대의 UN군 항공기를 더 요격했지만 이 3대는 추락하지 않고 심각한 파손만 입은 상태로 모두 기지로 귀환했기 때문에 크라마렌코의 격추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의 마지막 전투는 1952년 1월 17일이었다. 그는 이 날 미 공군의 F-86C 한 대를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후속 기체에게 스스로도 격추를 당했다. 크라마렌코는 스핀이 걸린 기체에서 간신히 사출한 뒤 낙하산을 개방했다. 그는 ​낙하산에서 매달려 내려오던 중 F-86의 기총에 사살당할 뻔 했으나 그의 우군기가 두 번이나 미군기를 방해해 간신히 살아남았고, 곧 북한의 한 마을에 낙하했다가 단둥으로 보내졌다. 훗날 기록에 따르면, 이날 이 소련 공군 에이스를 죽일 뻔 했던 인물은 미 제 51 전투요격단 16 전투요격대대 소속 윌리엄 F. 셰퍼(William F. Shaeffer) 소령이었다고 한다.

소련은 1953년 1월 31일자로 한국에서 철군을 결정했으며, 크라마렌코가 소속되어 있던 176 호위 전투항공연대도 이 때 소련으로 귀환했다.

크라마렌코는 귀국 후 소련 공군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조지아(그루지아) 등지에서 근무하던 중 197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신형 MiG-21로 기종 전환 교육을 받고 이라크 공군을 지원했다. 다시 1970년대 중반에는 알제리로 이동해 알제리 조종사들의 전술교육을 실시했으며, 1976년 경 소련에 귀환한 후 이듬 해 공군 소장으로 퇴역했다.

크라마렌코는 1981년 소련 영웅협회(: 참전용사협회에 해당. 대부분의 참전용사가 인민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가 많아 명칭이 이렇게 붙었다) 부회장이 되었으며, 2006년에는 <메서슈미츠와 세이버에 대항하여>라는 자서전을 냈다. 이 책은 2008년 <전장 위의 붉은 공군: 동부전선과 한국에서의 항공전>이라는 제목이 붙어 영어로 출판됐다. 그는 은퇴 후 모스크바의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둘이 살았으며, 2019년에는 아내가 사망하였고 그는 2020년 5월 21일,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앞서 언급했듯, 소련의 6.25 전쟁 참가는 냉전이 끝난 뒤 KGB 아르히프(Archives)에서 관련 문서가 공개되어 공식적으로 밝혀졌으나, 전쟁 당시 미군은 러시아어로 오가는 교신을 가로챘기 때문에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물론 소련 정부는 참전사실을 감추기 위해 조종사들에게 항공 교신도 중국어나 한국어로 할 것을 명령했었지만, 워낙 위급한 상황에서는 익숙치 않은 언어로 교신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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