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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2022. 11. 29] 6·25 전쟁의 '실존' 캡틴 아메리카, 미야무라 히로시 상병 별세

라마막 2022. 12. 1. 15:24

6·25 전쟁에서 귀환 후 명예대훈장을 수여받고 기념촬영을 한 미야무라 히로시 상병.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24일, 미 제 3보병사단 7보병연대 H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히로시 미야무라(Hiroshi Hershey Miyamura, 1925~2022) 상병은 대전리 근처의 방어진지에 배치됐다.

이날 중공군의 미친듯한 공세가 시작되자 미야무라 상병은 자신의 진지에서 뛰쳐나와 대검을 착검한 후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여 열 명을 쓰러뜨렸다. 다시 진지로 돌아온 그는 부상당한 동료들을 돕다가 이들의 퇴거를 지휘했으며, 잠시 후 중공군의 제 2파가 시작되자 동료들이 퇴거하는 동안 기관총좌에서 적들을 향한 제압사격을 실시했다. 잠시 후 기관총의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다시 소총에 대검을 착검하여 적들을 헤치고 나아가 다른 기관총좌로 이동했으며, 이 곳에서 계속 자신의 분대원들이 퇴각하는 내내 엄호사격을 실시해 약 5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한 뒤 기관총좌에서 그대로 기절했다. 그는 그 상태로 중공군에게 포로로 생포됐다.

미야무라 상병은 28개월 후인 1953년 8월 23일 UN군과 공산군 간의 포로 교환을 통해 풀려났다. 히로시 미야무라 상병에게는 그 사이에 명예 대훈장이 수훈되어 있었으나, 만약 그가 명예대훈장 수훈자라는 사실이 공산군 진영에 알려지면 적들이 교환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어 미군 당국은 그가 풀려나는 날까지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 그는 625 전쟁 기간 중 명예대훈장을 수훈받은 유일한 일본계 미국인이며, 전쟁 기간 중 살아서 명예 대훈장을 수훈받은 단 아홉 명 중 하나였다.
 
미야무라 히로시 상병의 명예 대훈장 수훈식 모습.


미야무라 상병은 전역후 츠치모리 '테리' 츠루코(Tsuruko 'Terry' Tsuchimori, 1925~2014) 여사와 결혼했으며, 세 명의 자녀와 네 명의 손주를 두었다. 그 중 마리사 미야무라(Marisa Akimi Miyamura)는 미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미 공군에서 장교로 임관하여 군인이 되었다. 히로시 미야무라는 군을 떠난 뒤 뉴멕시코 주 갤럽(Gallup, NM)에서 살았으며, 자동차 정비사가 되었다가 훗날 주유소까지 함께 경영했다. 그는 전상장병 복지와 재미 일본인 문제, 전역장병 처우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2022년 11월 29일, 애리조나 주 피닉스(Phoenix, AZ)에서 거주하던 중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전역 후 내내 거주했던 뉴멕시코 주 갤럽 시는 1개 구역에 그의 이름을 헌정해 '미야무라'로 명명했으며, 동일 지역 내의 고등학교 역시 '히로시 H. 미야무라 고등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한 I-40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오버패스 다리에도 그의 이름이 명명됐다. 

 

생전에 촬영된 손녀 마리사 미야무라 중위와 히로시 미야무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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