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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9. 6] UN군, '피의 능선' 전투 승리

라마막 2023. 4. 13. 00:31

6.25 전쟁 중인 1951년 9월 6일, 미 제 2보병사단 소속 병사 두 명이 폐허가 된 통칭 "피의 능선(Bloody Ridge)" 정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이 능선은 일명 "펀치볼(Punchbowl)"이라 불린 해안 분지 서쪽의 방산면 현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현재의 강원도 양구군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1951년 중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은 다시 출발지인 군사분계선 인근까지 밀려 내려왔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역습을 하면서 일부 전선을 회복하긴 했으나, 전체적인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이에 UN 진영과 공산진영은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미 제 8군사령관인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 중장은 예하 미 제 10군단장인 클로비스 바이어스(Clovis E. Byers, 1899~1973) 소장에게 '능선에서 캔자스(Kansas) 선까지 야포 사격을 직접 가할 가능성이 큰 인민군 관측소를 모두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직 대한민국 국군이 자신감이 결여되었고 경험이 미숙하다고 판단했으므로 이를 개선할 목적으로 미 10군단이 국군 부대와 협조하여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대한민국 육군 제 5사단 36연대가 미 제 2사단에 임시 작전통제 되었다.

전투는 고지에 배치된 국군 36연대의 전면으로 인민군 공세가 개시되면서 시작됐다. 36연대는 훗날 "피의 능선"이라 명명하게 된 이 고지를 사수하려 했으나 인민군 공세가 치열해지자 일단 정상에서 퇴각했다. 이에 미 제 2사단장 클라크 루프너(Clark L. Ruffner, 1903~1982) 소장은 미 제 9보병연대 병력을 차출해 국군 36연대를 지원했으나, 인민군이 밀리지 않아 고지 탈환에는 우선 실패했다. 인민군은 벙커를 깊게 구축하고 지뢰지대를 구축해 정확한 직사화기로 공격했음에도 그 자리를 사수했다.

다시 미 8군 병사들이 언덕 경사로에 기관총 진지를 만들어 인민군 진지로 기관총을 퍼부어 댔으나, 여전히 쌍방 간에 소모전 양상이 되면서 병력을 크게 잃은 국군 36연대의 사기가 급격히 추락했다. 심지어 36연대 예하부대 일부가 공세선을 풀고 도주하는 바람에 미 9연대까지 사기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바이어스 소장은 방법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군단 전체의 전면을 조금씩 이동하기로 했으며, 광범위한 군단 지경선 전면부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인민군이 제한적으로 갖춘 자동화기를 소모하게 하고 적 증원을 차단할 계산이었다.

10군단 전체가 제한적으로 북상하기 시작하면서 우선 국군 제 5사단이 "펀치볼" 주변부를 점령했고, 심지어 미 제 1 해병사단에게 할당했던 펀치볼 동북쪽 주변까지 장악했다.  또한 미 제 2사단은 피의 능선에 압박을 가하는 한편, 국군 7사단은 언덕의 서쪽 지역을 공격해 장악하고자 했다. 미 제 1해병사단 및 증원 배속된 국군 해병대는 약간의 저항을 받았으나 8월 31일부터 진격을 시작했고, 전체적으로 인민군 전선이 밀리는 양상이 되자 이 지역을 맡은 인민군 2군단과 교대하기 위해 인민군 3군단이 진지교대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 2사단이 1사단과 진지교대를 실시했는데, 미 해병대는 이 타이밍을 포착하고 인민군 1사단의 진지를 공격해 펀치볼의 북쪽 입구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미 제 9연대는 8월 말부터 피의능선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9월 1일까지 이 곳의 인민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에 임시로 2사단 지휘권을 받은 토머스 드샤조(Thomas Deshazo, 1901~2012) 준장은 23연대와 38연대 병력으로 포위를 두 겹으로 두텁게 한 다음 9연대로 계속 능선을 공격했다. 결국 9월 4일부터 인민군의 방어가 약화됐으며, 결국 이튿날 미 제 2사단 병력이 능선을 점령하면서 전투가 끝났다. 인민군은 9연대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자 간신히 능선에서 퇴각했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양의 물자를 그대로 포기했으며 500여 구에 달하는 시신도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

3주간의 전투로 미 제 8군은 2,7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결국 이 "피의능선"을 점령했다. 한편 2사단 측 추산으로는 이 전투 중 인민군의 사상자는 15,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군 피해가 특히 엄청났던 이유는 우선 지휘선의 융통성 문제를 꼽는다. 소부대 지휘관들이 퇴각해야 한다고 판단하더라도 상급부대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그대로 다 사상자가 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퇴각을 허가하더라도 이는 이미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는 UN 측의 엄청난 야포와 항공지원 때문이었다. 공산군 진영에는 항공지원이 전무했으며, UN 측이 엄청난 포화를 퍼붓고 나면 대응사격을 할 중화기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피의능선에서 퇴각 후 1,400m 지점과 11km 바깥 언덕에 다시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 곳은 이후 또 다른 전장이 되면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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