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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0. 9]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 총좌, UN군 투항

라마막 2023. 4. 26. 17:10

1950년 9월, 대구에서 미군에게 투항한 직후 촬영된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李學九, 1922~1963) 총좌. 그는 낙동강까지 진출한 인민군 제 13사단 참모장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의 선두부대와 후속부대 간 허리가 끊기자 마주 대치 중이던 미 제 1기병사단 8기병연대 1대대 B중대에 투항했다.

그는 6.25 전쟁 중 UN군의 포로가 된 인민군 최고위급 장교였으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휴전이 되고 나서야 포로교환이 이루어져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2년 여름 거제도에서 일어난 공산 포로 폭동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 <이런전쟁(This Kind of War)>에서도 소개된 인물. 총좌는 현재 폐지된 계급으로, 국군 계급에 대응하자면 준장에 가깝다(소좌-중좌-대좌-총좌).

소속대인 인민군 13사단은 개전 초부터 승승장구하며 낙동강까지 진격했으나, 보급선이 길어진 상태에서 UN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가 인천에 기습상륙을 실시하는 바람에 부대가 그대로 고립됐다. 그는 이에 사단장인 정용진(洪鏞鎭) 소장에게 퇴각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했고, 이에 격렬히 항의하며 다투다가 정 소장에게 총격을 가하고 그대로 탈영했다. 그는 그 길로 다부동 남쪽 삼산동까지 내려갔다가 새벽녘에 대로에서 잠들어 있는 미 제 8기병연대 병사를 발견하고 그를 흔들어 깨운 뒤 항복했다. 그가 항복한 후 낙동강 전선에 걸쳐있던 1, 3, 13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패했으며, 그 중 13사단은 특히 피해가 심해 사실상 괴멸됐다.

사실 그는 작전계통에 있던 인물인데다 개전부터 2군단 작전참모로 참가했다가 보직을 바꿨으므로 아는 것이 많았고, 어차피 사단장을 쏘고 투항한 상황이므로 적극적으로 UN군 취조에 협조하며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자료 중에는 훗날 북한의 불법남침을 증명하는 증거 중 하나인 작전명령 제1호도 있었다. 애당초 그가 무엇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서 국군에 투항한 좌관급 장교 중에 동일 계급으로 국군에 편입시켜 준 사례(예를 들면 훗날 국군에서 장군까지 진급한 정봉욱 중좌)가 있었으므로 자신도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거나, 최악의 경우엔 포로처리되어 제3국으로 보내질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듯 하다.

실제로 그는 수차례 국군에 귀순의사를 밝혔지만, 미측은 그가 인민군 최고위급 계급자다보니 훗날 포로교환 상황 등을 고려해 포로로 취급하고 귀순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대우는 최상위 계급자에 맞는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거제도의 공산군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거제도 포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계급 때문에 친공 진영 대표가 됐다.

그는 1953년까지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다가 휴전이 성사되면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따라 앞서 대전에서 인민군 포로가 되어 있던 미 제 24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1899~1981) 소장과 맞교환 됐다. 입장이 애매한 상태로 귀국한 그는 당연히 북한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을리 없었고, 실의에 빠져 살던 중 1963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험난했던 인생사와는 달리, 훗날 함께 수감됐던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겸손한 인격자였다고 하며, '공산주의자라는 것만 빼면' 흠잡을데가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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