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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2. 2.] 2차대전 중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끈 백전의 노장,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다

라마막 2023. 4. 19. 09:33

자유프랑스에서 활약하며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끌었으며, 6.25 전쟁에서도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랄프 몽끌라르(Ralph Monclar), 본명 라울 마그랭-베르느레(Raoul Charles Magrin-Vernerey, 1892~1964) 장군.

첫 사진은 미 10군단장이자 맥아더 원수의 참모장이던 알몬드 소장과 대화 중인 모습이며, 두 번째 사진은 프랑스 대대(미 제 2사단에 예속되어 있었음)원에게 훈장을 수여 중인 모습이다.

: 가명을 쓴 이유는 나치 독일을 피해 자유프랑스에 합류했을 당시, 본명으로 활동하면 본국에 두고 간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 때문이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프랑스 외인부대(Légion étrangère, 레종 에뜨랑제)에 지원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입대가 거부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1912년 생시르(Saint-Cyr) 프랑스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1914년에 졸업했으며, 첫 근무지로 제 60 전열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이 곳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게 된 그는 종전까지 대위로 진급했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 기사장을 포함한 11개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는 부상도 일곱 차례나 입으면서 총알이 사타구니를 관통했고, 수류탄 폭압 때문에 한 쪽 팔이 부러졌으며, 눈에는 화상을 입는 등 처절하게 싸웠다.

간전기 기간 중에는 연합군 동방사령부에 배속되어 참모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제 1 모로코 척후병 연대에 배치됐다. 이후 잠시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근무한 베르느레는 192431, 일찌기 나이 때문에 입대가 거부됐던 제 1 외인 보병연대에 배치됐다. 1연대에서 짧은 근무 후 다시 그는 3연대에 배치됐으며, 이 곳에서 1927년 모로코 전쟁을 치르면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잠시 일반 보병부대로 이동하기도 했으나 계속 외인부대로 돌아왔으며, 2차 세계대전 개전 직전에는 베트남 통킹에 주둔 중이던 제 5 외인보병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381, 베르느레는 알제리 사이다(Saida)에 주둔 중이던 제 4 외인 보병연대 예하 훈련대대장으로 보직됐다. 다시 1940년까지 제 13 외인 경산악 반여단에 배치된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 됨에 따라 라르작(Larzac)과 사토니(Sathonay) 등지를 옮기며 부대를 재편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노르웨이로 탈출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독일군과 싸웠다. 그는 이 전투의 승리로 독일군이 사로잡았던 포로를 놔두고 강제 퇴거하게 강요했으며, 10대의 융커(Junkers) Ju52 수송기를 비롯한 수많은 독일군 무기를 노획했다.

다시 노르웨이 나르비크(Narvik)로 이동한 그는 계속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으며, 이 시기(1939~1940)'유일한 프랑스 군의 승리'를 달성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60명의 연합군 포로를 석방하고, 400명의 독일군을 사로잡았으며, 10문의 야포와 다수의 물자를 노획했다.

그는 간신히 약 500명의 부대원과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 영국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했다. 그는 이 때부터 "랄프 몽끌라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으며, 자유프랑스군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동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한 그는 자유프랑스 제 1사단을 지휘하여 케렌(Keren)과 마사와(Massawa) 전투에 참전하면서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19416월에 비치 프랑스군과 레반트(Levant)에서 전투를 치르라는 명령을 거부했는데, 이는 당시 레반트에 배치된 비시 프랑스군 병력에 제 6 외인 보병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때의 동료들과 싸울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으며, 이에 따라 지휘권을 갖고 있던 드미트리 아밀라카바리(Dmitri Amilakhavari, 1906~1942) 왕자(중령)에 의해 1사단장에서 해임되고 다시 제 13 반여단장으로 보직됐다. 하지만 다시 13 반여단과 리비아 및 튀니지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종전 당시 알제리에 있던 그는 1948년 중장 진급과 함께 프랑스 외인부대 제 2대 감찰감이 되었으며, 1950년까지 계속 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1948~1950년까지 알제리,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베트남 등 외인부대가 주둔하면서 전투를 치르던 지역에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미 제 10군단(US X Corps) 군단장이던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과 대화 중인 몽클라르 장군.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직전이다.

1950년이 되자 그는 나이가 58세가 됐으므로 현역에서 물러나 퇴역을 신청했다. 하지만 625,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는 사태가 발발하면서 프랑스 정부가 지원군 파견을 검토하자 베르느레 장군은 스스로 자원하여 UN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신청했다. 하지만 대대급으로 파병을 결정한 프랑스 군은 장성급 지휘관을 보직시킬 자리가 없다고 답변을 했는데, 이에 그는 중령으로 강등된 가() 계급장을 달고 참전하겠다고 답했다. 이에 프랑스 군은 그를 한국대대(UN Bataillon de Corée) 대대장으로 보직했으며, 이 대대는 미 제 2보병사단 23보병연대에 배속됐다. 하지만 파병 후 미군을 비롯한 UN군 장교들은 그를 계속 중장급 장성으로 대우했다.

19512, 미 제 23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으며,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던 이 노병은 소수의 병력으로 밀려드는 중공군을 격파하는 신승을 거두었다. UN군 사령관이던 매튜 릿지웨이(Matthew Ridgway, 1895~1993) 장군은 이 전투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폴 프리먼(Paul Freeman, Jr., 1907~1988) 대령(대장 예편)이 지휘하던 미 제 23 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두 부대는 당시 주()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고립되어 있었으며, 거의 영하에 가까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밀려드는 중공군을 주야간으로 격퇴했다. 한참을 그렇게 싸우는 걸 겨우 진지 교대 해 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미군의 투사들과 프랑스의 전우들은 아마 미국이나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그 어느 우수한 부대와 비교해도 전투력이 손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평리 전투 후 표창을 받고 있는 프랑스군 병사의 모습. 왼쪽 팔은 미 제 2사단 마크로, 프랑스 대대가 2사단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2사단 부대 표지를 부착하고 있다.

그는 1951년 정년이 찼으므로 프랑스로 귀국했으며, 1962년 앵발리드(Les Invalides) 프랑스 군사박물관 명예 관장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베르느레 장군은 6.25 휴전 후 설립된 UN 프랑스군 한국연대 전국협회 창립 협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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