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8월 16일, "락앤롤(Rock and Roll)의 황제"로 불리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가 약물 과다 사용으로 자택인 그레이스랜드(Graceland)에서 사망했다.
프레슬리는 1964년부터 락앤롤을 대중화하면서 폭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독창적인 컨트리 음악과 리듬앤블루스를 결합한 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56년 1월 싱글 앨범인 "허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로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곧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각종 TV 프로와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이후에도 "제일하우스 록(Jail House Rock)", "캔트 헬프 폴링 인 러브(Can't help Falling in Love)",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등을 히트시켰다.
그는 1958년 미 선발징병청(USSS: United States Selective Service)에 의해 징병 대상자로 선정됐다. 당시 인기 최 절정을 구가하고 있던 그는 군소리 없이 미 육군에 입대했으며, 1960년까지 주로 독일에서 근무했다. 그는 독일 근무 중 훗날 아내가 된 프리실라 보우리외(Pricilla Beaulieu, 1958~)와 만났다. 안타깝게도 그는 전역 후 바비튜레이트와 흥분제 등의 약물에 중독됐는데, 이는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 두고두고 문제를 야기했다.
전역 후 다시 연예계로 복귀한 엘비스는 주로 헐리우드에서 지내며 <비바 라스 베가스(Viva Las Vegas)>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만 7년 만인 1968년부터 라이브 공연에 다시 나섰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건강은 반대로 악화됐는데, 워낙 생활 습관이 좋지 않은데다 약물 남용이 심했고, 스트레스성 폭식이 엄청 났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된 폭식 습관으로 야기된 문제라는 설부터 바비튜레이트 과다 투여설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나, 당대에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못했다. 그의 아내인 프리실라는 이미 1973년에 이혼한 상태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훗날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2009)과 잠시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 1968~2023)가 있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에게는 남매가 있었으나 아들이 2020년에 사망해버렸으므로 현재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손은 외손녀인 배우 라일리 키오(Danielle Riley Keough, 1989~)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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