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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상식사전] '환타(Fanta)'의 탄생 이야기

라마막 2022. 12. 10. 23:41

 

'환타(Fanta)' 로고. / ⓒ Coca-Cola Company

1923년, 코카콜라(Coca-Cola) 주식회사가 신임 사장으로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 Woodruff, 1889~1985)를 선임했다. 코카콜라 브랜드를 미국 내 뿐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코자 했던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전세계 시장으로 사세를 넓혀본다는 코카콜라의 '수출' 시도는 처음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 코카콜라 생산시설의 경우에는 병입 과정에서 위생 관리를 잘못해 음료를 마신 사람들이 식중독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카콜라의 수출실적은 '매우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임 우드러프 사장은 본격적으로 수출에 뛰어들면서 '해외사업부(Foreign Department)'를 설치했다. 훗날 '코카콜라 수출 주식회사(Coca-Cola Export Corporation)'이 된 이 부서는 전세계 27개국에 코카콜라 생산공장을 설립했으며, 코카콜라 본사에서 보낸 콜라 원액과 향을 받은 후 현지에서 설탕 등 단순 원료를 구입해 음료를 완성하는 형태로 설계했다. 그리고 드디어 코카콜라의 염원처럼 코카콜라의 전세계 인지도가 폭발했다. 코카콜라는 이에 힘입어 1928년 암스테르담(Amsterdam) 올림픽 스폰서를 맡았으며, 전세계인이 모인 이 행사에서 도시 내 광고판과 모자, 선수들의 옷에 코카콜라 로고를 도배해 넣으면서 마케팅이 대성공했다. 코카콜라 광고는 '아메리칸 라이프'를 상징하게 됐으며, 미국의 애국주의와 동일한 '아이콘'이 되었다.

코카콜라는 유럽으로 사세를 확장해 독일에 진출하면서 에센(Essen) 지방에 독일 법인을 설립했다. 코카콜라 독일 법인은 미국 영주권자인 레이 리빙턴 파워스(Ray Rivington Powers)가 운영을 맡았다. 그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었으며, 능력있던 세일즈맨으로 종종 고객들에게 '코카콜라 주식을 사면 훗날 플로리다에 빌라 한채를 사 부유하게 살 수 있을 것'을 약속하곤 했다. 그는 법인 대표로 취임한 직후 연 6,000 상자 정도 판매되던 콜라를 100,000 상자까지 팔아치웠다. 하지만 사실 세일즈에는 강했지만 경영에는 어두웠던 그의 휘하에서 코카콜라 독일 법인의 재무기록이 엉터리였고, 장부는 맞지 않는데다가 은행 대출금도 밀린 채였다.  

그러던 중인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잡고 제 3제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아직 이 때까지 아무도 이 사나이의 등장이 코카콜라 독일 법인의 새 시대를 열게 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같은 해, 경영과 재무 상태를 엉망인 채로 지사를 운영하던 레이 리빙턴 파워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에 본사는 막스 키스(Max Keith, 1903~?)를 새 대표로 선임했다. 그는 일단 이 법인의 재무 상태부터 정리하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당시 독일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므로 코카콜라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음료"로 홍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가급적 코카콜라가 담고 있던 "미국의 아이콘" 이미지를 없애는 대신 독일 소비자에게 맞는 이미지에 맞추어 나갔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먹히면서 일부 독일인은 코카콜라가 독일 브랜드라고까지 생각하게 됐을 정도였다. 

막스는 일전에 암스테르담 올림픽 캠페인이 대 성공했던 사실에 착안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회로 삼기로 결정했다. 코카콜라는 또 한 번 베를린 올림픽 스폰서로 나섰으며, (아직까지는 부정적 이미지가 덜했던) 나치 독일의 스와스티카 기와 함께 코카콜라 로고가 온 사방에 걸렸다. 코카콜라 광고는 운동경기장 뿐 아니라 히틀러 소년단 집회에 동원된 트럭에도 새겨졌다. 

1938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사용된 <코카콜라> 광고.


막스 키스는 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 일명 '나치 당'에 가입한 적은 없지만, 제 3제국이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실제로 그가 나치 당에 협력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그는 사업 목적으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줄곧 집권당인 나치당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전쟁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독일 정부는 독일에 진출한 해외 기업부터 손보기 시작했으므로, 히틀러가 1939년 9월 폴란드에 침공한 뒤 전 유럽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자 키스 역시 미국계 기업인 코카콜라도 도 해를 당하거나 국유화 될까봐 우려했다. 그러던 와중에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면서 미국이 추축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뒤 2차세계대전에 뛰어들자 미국과 완전히 적대국이 되어 버렸다. 미국은 1917년에 입법된 <적국 무역 금지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of 1917)>을 근거로 들어 추축국에 대한 전면적인 엠바고(embargo)를 단행했다. 이 조치로 코카콜라 독일법인과 본사 간의 재정적 연결이 강제로 끊겼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본상로부터 더 이상 핵심 원료인 콜라 시럽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이 상황까지 왔을 때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은 독일에서 철수 수순을 밟았으나, 막스 키스는 40개의 현지 생산시설과 수천 명에 달하는 종업원을 어떻게든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 공장을 돌리겠다는 일념으로 콜라 시업의 대안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전술적 결정을 내렸다. 즉, '독일 현지형' 자체 청량음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는 우선 사내 화학연구 책임자인 셰텔리히(Schetelig) 박사로 하여금 코카콜라와 가장 유사한 음료를 만들도록 시키면서 카페인과 이것저것 원료들을 섞어보게 시켰다. 하지만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므로 가용한 원료는 다른 음식 산업에서 남긴 재료들 뿐이었다. 이렇게 얻은건 사이다 압착 후에 남은 사과 섬유같은 과일 펄프가 대부분이었고, 치즈를 짜고 남은 유청 같은게 전부였다. 그나마 공급이 넉넉했던 것은 독일 도처에서 구할 수 있던 사과였으므로, 코카콜라 독일법인은 이 사과를 갈아버려 분말형태로 쓰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탄생한 음료는 약간 갈색을 띄는 사과향의 음료로, 오늘날의 진저에일(ginger ale)과 유사한 색상이었다. 우선 이 음료를 팔아보기로 한 영업팀은 그럴듯한 이름을 고민했으며, 그 결과 그는 '상상'이라는 의미를 담은 독일어 "환타지(Fantastisch)"에서 차용해 온 '환타(FANTA)'로 명명했다. 이 이름은 대부분의 라틴어 계열 언어권에서 동일한 의미로 동일하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코카콜라 독일 법인은 1941년에 '환타' 상호등록을 마쳤으며, 일단 이름은 대 히트를 쳤다.

막스 키스가 회사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이 '환타' 뿐이었다. 또한 독일 국민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청량음료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전쟁시기 독일에서 환타의 인기는 대 폭발했으며, 설탕 공급 제한이 걸렸을 때도 환타 생산 시설은 제한을 받지 않다보니 '독일에서 가장 단' 음료가 되었다. 설탕을 구하기 힘들던 독일 가정에서는 수프나 스튜를 만들기 위해 환타를 넣기 시작했고, 온 가정이 필수적으로 구비하는 음료의 위상을 차지하면서 코카콜라 독일지사는 살아났다. 

키스는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하기 위해 그간 쌓은 제3 제국 요인들과의 커넥션을 이용해 독일군에게 납품을 시도했고, 청량음료가 필요했던 독일군은 흔쾌히 환타와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환타는 독일과 독일 점령지 전역에서 팔리면서 전쟁기간 중 약 300만 상자를 팔았으며, 사실상 추축국의 대표 음료가 되었다.

코카콜라 광고가 보이는 독일 지내의 모습. 시기 미상


하지만 좋은 시절은 전쟁이 끝나면서 함께 끝났다. 전쟁이 패전 분위기에 몰리자 독일군의 한 장성은 막스 키스를 찾아와 '코카콜라 독일법인'의 이름을 아예 코카콜라와 관계없는 것으로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다. 키스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진노한 독일 장성은 코카콜라 독일 법인에 대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그는 행동에 들어가기 전 미군 공습에 당해 전사했다. 이렇게 지켜낸 코카콜라 독일법인은 곧 연합군 진주가 시작되면서 미군이 접수했고, 다시 코카콜라 본사가 독일법인과 연결이 되자 막스 키스는 환타 생산을 중단하고 환타의 생산권과 그간 이익분을 본사로 보냈다. 코카콜라 본사는 1949년 '환타' 음료명을 미국에도 특허출원 했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되면서 시장을 석권하게 된 코카콜라는 환타 브랜드를 사장시켰다. 굳이 추축국에 납품되던 음료를 살려놓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코카콜라는 또 한 번 위기에 몰리게 됐다. 바로 경쟁업체인 펩시(Pepsi)가 제품 스펙트럼을 넓히며 공격해와 시장 점유율을 뺏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코카콜라 경영진은 '반격' 카드를 고민하던 중 앞서 1945년에 사장시켰던 환타를 떠올렸고, 이번에는 사과향 대신 다른 향을 실험하다가 오렌지를 주 원료로 선택했다. 코카콜라는 이 음료를 '환타 오렌지(Fanta Orange)'라는 이름으로 리브랜딩을 한 후 이탈리아에서 우선 출시했다. 다시 태어난 환타는 밝은 오렌지색 병으로 다시 제작했고, 병은 프랑스 디자이너인 레이몽 로위(Raymond Loewy)가 고리를 쌓은 듯한 독특한 모양의 병을 디자인했다. 병은 짙은 오렌지 색으로 칠했는데, 이는 원료가 유통 과정에서 빛 때문에 변질되는 것을 막은 것이며, 고리를 쌓은 듯한 모양은 손으로 쥐기 쉽게 할 목적이었다. 

2015년 독일에서 출시된 "환타 클라식". 최초 레이몽 로위가 디자인한 병 모양으로 출시했다.


환타는 1955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험 판매에 들어갔으며,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1956년부터 정식 판매에 들어가 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부터 판매를 개시했다. 1960년이 됐을 무렵에는 총 36개국으로 판매처가 증가했으며, 심지어 1979년에는 소련, 1984년에는 중국까지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전세계적인 히트 브랜드가 되었다. 

 코카콜라는 2015년 '환타' 탄생 75주년을 기념했으며, 이 때 독일에 판매됐던 탄생사를 언급하면서 '좋았던 시절(Good Old Times)'이라고 언급해 물의를 빚었다. 코카콜라는 곧 해당 영상을 내린 후 사과문을 올렸으나, "올해로 75주년이 된 환타는 히틀러나 나치당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를 담으려 했을 뿐이다"라고 해명했다. 사실 환타의 사례는 '절박한 필요'가 도덕적 모호성과 결합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제 3제국에서 남은 원료를 혼합해 만든 음료가 탄산음료로 탄생했고, 그것이 이탈리아에서 밝은 색의 음료로 다시 태어났으며, 오늘날에는 전세계 모든 이들이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현대의 소다 음료 중 이만큼 재미있는 배경을 가진 음료가 또 있을까?

오늘날의 "환타 오렌지". / Coca-Cola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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