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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0. 7. 18] 일본의 쉰들러, 스기하라 지우네의 '생명의 비자'

라마막 2022. 12. 16. 10:11

스기하라 지우네 부부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1900~1986)는 리투아니아에 파견되어 있던 일본 외교관으로,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들을 집결시키기 시작하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1940년 7월 18일부터 약 열흘동안 비합법적인 비자를 발행했다. 그는 수기(手記)로 하루에 18시간씩 비자를 써서 유럽을 탈출하려는 유대인들에게 발급했다. 결국 1940년 7월 28일자로 일본이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관에 대해 폐쇄 명령을 내리자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와중에도 계속 비자를 발행했으며, 마지막에는 기차에 올라탄 뒤 창문을 통해 마지막 비자를 유대인들에게 뿌리며 역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세상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살리고자 한 그의 희생적 행위를 그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인 1985년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서구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셈포('지우네'의 한자를 다른 음역으로 읽은 이름)'라는 이름으로도 자주 불렸으며, 그의 아내인 스기하라 유키코(杉原幸子, 혹은 키쿠치 유키코) 역시 그의 남편의 이러한 행위에 함께 가담해 나치의 눈을 피해 비자를 전달할 방법을 강구했다.

 

결국 스기하라 가족은 소련군에게 체포됐으며, 소련군 포로수용소에 구금되어 전쟁이 종전하기까지 18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귀국 후 1년도 되지 않아 사직을 권유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가 그에게 사직을 권유했던 이유는 전후 정부기관이 급격하게 축소되면서 인원을 감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전쟁 기간 중 그의 행동을 문제삼아 감원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단순히 비자를 발행한 것이 아니라, 본국의 지시를 거부하고 발행한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비자 발행 허가를 본국에 세 번이나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 당했고, 비자 발행을 불허 한다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했다.

 

그는 은퇴 후 일본 미우라 반도의 가마쿠라 시(鎌倉市)에서 지내며 사업가 겸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가서야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열방의 의인"상을 수여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감사의 뜻으로 그의 사후 스기하라 부부의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리투아니아 구호십자장(1993), 폴란드 공화국 지휘관 십자기사장(1996) 등을 사후 수여했다. 그리스 정교회 일부에서는 정식 성인은 아니지만 복자에 준하는 위치로 그를 기리고 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전쟁 기간 중의 선행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사망했는데, 우선 전후 유대인 협회 등에서 그의 행적을 일본 정부에 문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확인을 거부해 이스라엘 정부가 그의 생사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일본 외무성은 1991년 10월에 가서야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정무차관 명의로 스기하라 지우네 영사대리의 부인인 사치코 여사를 초청해 2차대전~전후 일본 정부의 대응에 대해 사죄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계 유대인을 6,000명에서 10,000명까지 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키코 여사는 1998년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예루살렘에 방문해 그녀의 남편이 구해낸 생존자들과 만나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1900년 기후현 미노(美農)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조선에서 일을 하던 부친을 따라 조선에서 학업을 마쳤다. 부친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래 경성의대(현재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지원을 권유했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던 그는 의도적으로 시험지에 이름만 적어 내 낙방한 후 1918년 와세다(早稲田)대학교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919년 외무성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이 되었으며, 1920년부터 1922년까지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조선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1922년 11월에 전역을 선택해 외무성 러시아어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며, 그는 외교관으로써의 첫 임지로 하얼빈에 부임했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 귀족 가문의 딸인 클로디아 세미노프나 아폴로노바(Claudia Seminovna Apollonova)와 결혼했으나 1935년에 이혼했으며, 잠시 일본에 귀국했을 때 두 번째 부인이 된 유키코와 만나 결혼해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전후 귀국한 이들 가족은 가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藤沢市)에 정착했으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처음에는 전구 판매상을 하다가 나중에는 미군 PX에 군납제품을 납품하는 업체에서 부장으로 근무했다. 한편 이스라엘 정부는 계속 그의 행적을 추적했는데, 1968년 도쿄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상무관으로 근무하던 예호슈아 니시리(Yehoshua Nishiri) 상무관이 종전으로부터 23년만에 스기하라 부부를 결국 찾아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스기하라 가족을 1969년에 국빈으로 초청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으로부터 45년 뒤인 1985년, 한 일간지는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에 왜 잘 나가고 있던 본인의 커리어까지 걸고 유대인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스기하라 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면 유대인 난민들은 인간이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아마도 누구나 면전에서 이들을 보았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난민 중에는 늙은 여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도 절박한 나머지 제 구두에 키스까지 했습니다. .. 반면 일본 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습니다. ... 군과 정부가 다른 의견을 냈고, 도쿄에서 오는 지침은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쿄에서 오는 답을 기다리는 대신 혼자서 행동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누군가가 미래에 제 행동을 문제삼으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 하지만 내 자신은 이것이 옳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람 목숨을 구하는데 틀린 일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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