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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2. 8] 일본, 필리핀 침공 개시

라마막 2022. 12. 10. 12:37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당시 미국령이지만 자치권을 부여 받은 상태였던 필리핀으로 침공했다. 일본 입장에서 필리핀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우선 이 곳은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에 가까운 전초기지였으므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으며, 일본이 이 곳을 점령할 경우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을 침공하는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위치 자체가 일본과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필리핀이 확보되어야 두 지역 간에 보급선을 확실하게 방호할 수 있었다.

필리핀 현지시간 새벽 3시경, 필리핀 주둔 미군은 진주만이 일본군에게 공습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일본과 일전은 사실상의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결국 그 날이 도래한 것이다. 일본이 침공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미군은 필리핀에 주기 중이던 항공기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했다. 미군은 일본군이 진지를 설치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 제대로 준비하거나 결정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전에 이미 필리핀과 영령 말라야를 동시에 침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 외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군은 방어 준비조차 못한 상태로 지상에 주기되어 있던 항공기들 상당수를 일본군 공습으로 상실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대장이 지휘하는 미-필리핀 연합군은 일본군의 필리핀 상륙 및 진격을 저지할 수 없어 바탄 반도로 퇴각했고, 이 곳에서 1942년 4월까지 버텼다. 약 8만 명의 미군과 필리핀 연합군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으나,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 공습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고, 태평양의 연합군 근거지인 홍콩이나 말라야, 싱가포르까지 모두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자 증원을 기대할 방법이 없었다.

한편, 미 정부는 이 상황에서 시작부터 최고위급 지휘관이 포로가 될 경우의 타격이 우려되었고, 연합군에 가담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연합군 전력을 다시 구성해 반격하기 위해서 고급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맥아더 장군을 필리핀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미군은 비밀리에 잠수정을 투입해 맥아더 장군만 탈출 시켰고, 뒷일은 부사령관인 조나단 웨인라이트(Jonathan M. Wainwright, 1883~1953) 소장에게 맡겼다. 중장으로 진급한 웨인라이트는 사실상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하고자 했고, 이에 참모장인 에드워드 킹(Edward P. King, 1884~1958) 소장을 일본군과 협상하기 위해 보냈으나 일본 측은 "아직 협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그 때까지 일단 돌아가서 열심히 싸우라"고 모욕을 주어 돌려보냈다. 결국 바탄반도와 코레기도르(Corregidor) 두 지역으로 나뉘어 방어하고 있던 미-필리핀 연합군은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1887~1946) 대장에게 5월 6일자로 항복했다.

이후 6만 명의 포로와 가족들, 그리고 8만 명의 필리핀 군 포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이송되기 위해 땡볕에 행군을 강요받았고, 그 과정에서 약 112km 거리를 땡볕에서 걷도록 강요받다가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수는 약 5,500명에서 18,000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통제할 인원 수가 많자 일본군은 행군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이들을 다루었고, 체력이 약한 여성, 아이들, 환자들부터 탈수 증세로 쓰러졌다. 심지어 이 곳에서 수송선 편으로 일본이나 만주 등지로 다시 이동하던 포로들은 포로 탑승 사실을 모르는 연합군 폭격기에게 당해 수장 당한 경우도 많았다.

필리핀 전투는 미군이 건국 이래 당한 최악의 패배였다. 동시에 일본에게 있어서는 전쟁 초반 전선 확장 단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 사례이기도 했다. 일본은 진주만, 필리핀, 홍콩, 말라야, 싱가포르 동시 기습의 성공으로 동남아-태평양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당장 전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했다. 반면 미군은 진주만으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탈출한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의 지휘 하에 오스트레일리아를 태평양 지역의 새 연합군 근거지로 삼아 반격을 위한 재편에 들어갔다.

필리핀 전투는 2차 세계대전 개전 후 미군의 첫 지상전 패배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와 미 본토로 한 발 물러선 후 반격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군은 맥아더가 필리핀을 떠나면서 남긴 "다시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란 말처럼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칼을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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