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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1804. 1. 2] 아이티 혁명으로 최초의 '노예들이 세운 국가' 성립

라마막 2024. 1. 2. 10:23

180412, 아이티(Haiti)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프랑스는 1659년 초부터 당시 '생도맹그(Saint Domingue)'로 불리던 아이티를 식민지로 삼았다. 바로 옆에 있던 영국령 식민지인 자마이카와 함께 생도맹그는 곧 전세계 최대 설탕 공급처가 되었다. 설탕 산업은 커피, 코코아, 인디고 산업과 함께 중남미 무역에서 큰 할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도맹그에는 곧 노예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노예제에 기반한 대규모 농장사업이 계속 팽창하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잡아다 이 곳 농장주에게 파는 '노예무역' 역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1787~1788년 사이에 횡행한 황열병 등 각종 질병으로 사망률이 크게 늘어 최대 50%에 가까운 생도맹그의 노예가 죽고 말았다. 프랑스는 이 곳에서 뚜렷한 계급제를 나눈 후 본토 프랑스 출신의 감독관들이 혹독하게 노예를 다루었다. 이들은 심한 경우 노예 처벌을 위해 거세형까지 단행했다.

1789,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생하자 1791821, 브와 카이만(Bois Caiman)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노예주와 그 가족에게 그간의 처우를 보복하기 위해 대규모로 노예들을 조직화 해 프랑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력과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이들 노예는 로마제국 시절에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이래 최대 규모의 노예 봉기로 불과 열흘 만에 북부지역을 장악했다. 이 봉기 중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투상 루베르튀르(Toussant Louverture, 1743~1803), 그는 노예들을 군사 조직화 하면서 '아이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투상은 자유 노예였으며, 아이티 문화와 백인 문화를 어떻게든 연결해보려 노력했다.

생도맹그 혁명은 180411일에 끝났으며, 이를 통해 12일자로 노예 봉기가 신생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진 유일 무이한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아이티 혁명 전, 혁명 중, 그리고 혁명 후 이 땅의 삶을 '잔인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프랑스의 역사가인 폴 프레고시(Paul Fregosi)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었다.

"백인, 물라토(백인-흑인 간의 혼혈들), 흑인이 서로서로를 경멸했다. 가난한 백인들은 부유한 백인을 참고 보지 못했고, 부유한 백인들은 가난한 백인들을 천시했다. 중산층의 백인들은 관료 사회를 형성한 백인들을 미워했고, 프랑스 출신 백인들은 (아이티) 현지에서 태어난 백인을 깔봤다. 물라토는 백인을 질시하는 한편 흑인을 무시했고, 동시에 백인으로부터 무시 받았다. 자유 흑인들은 여전히 노예인 흑인들을 잔인하게 대했고, 아이티에서 태어난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흑인들을 야만인처럼 다뤘다. ... 결국 문자 그대로 이 땅의 모두가 다른 모두를 두려워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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