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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 1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민군이 내전 승리기념 퍼레이드를 하자 이탈리아 자원군단(Corpo Truppe Volontaire) 병사들이 이에 함께 참가해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상장의 사열을 받는 중인 모습.
이탈리아 자원군단은 1936년~1939년 기간 중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베테랑 병사들을 모아 파병한 원정군이었다. 최다 파병시기에는 군단 예하에 6개 차량화 보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병력은 7만에서 7만 5천명 규모였고 항공기도 758대나 갖추고 있었다.
내전 기간 중 이탈리아 군단은 말라가 (Malaga) 전투, 과달라하라 (Guadalajara) 전투, 북부지역 전투, 산탄데르(Santander) 전투, 아라곤 (Aragon) 공세, 에브로 (Ebro) 전투 등 다양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스페인 내전의 사실상 마지막 전략적 공세작전인 카딸루냐(Catalonia) 공세에도 참전했다.
실제로 지원세력을 기대할 수 없던 프랑코의 국민군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파병한 독/이 자원군이 없었다면 쿠데타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막 통일을 이룬 후 유럽 '열강' 반열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던 이탈리아는 이 내전이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이들은 스페인 항구 일부와 포르투갈 해안을 점령한 후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아 육상으로 치고 올라갔고, 동시에 이 항구를 거점으로 잠수함을 운용해 소련을 비롯한 해외 공화파 지원세력의 스페인 수송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당시 막 창설된 국제연맹(LN: League of Nations)은 1937년 9월에 이 행위를 불법적인 "해적행위"로 규정함에 따라 프랑스 해군과 왕립해군이 개입해 무산시켰다.
이탈리아는 이 내전에 약 78,000명을 파병했으며, 3,819명이 전사하고 10,629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대부분의 부상은 카탈루냐/아라곤 공세기간에 발생해 전체 부상자의 44%가 이 때 발생했다.
사실 한창 군국화 중이던 이탈리아에게 있어 이 내전 참가는 아이러니한 효과를 남겼다. 스페인 내전의 승리와 참전경험, 그리고 구식무기의 현대화는 이탈리아군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을지 모르지만, 이때 무리를 한 전비지출 부담은 불과 수년 뒤인 2차세계대전 중 이탈리아군의 활동을 크게 제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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