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2월 14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끝났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신성동맹군을 격파하면서 전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파벨 1세(Pavel I, 1754~1801)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1777~1825)가 그간 프랑스에 협조적이던 자세를 버리자 1812년 6월에 전격적으로 러시아 침공을 단행했다.
40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의 대육군(Grande Armee)은 9월 경 모스크바 외곽까지 도달했으나, 러시아 제국군이 보로디노에서 프랑스 군과 격돌하는 사이 초토화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 내의 물자를 모조리 도시 밖으로 반출해버렸다. 프랑스 군은 사실상 빈 도시를 전투 후에 점령했지만, 그날 밤부터 도시 곳곳에 화재가 발생해 얼마 남아있지 않던 물자마저 불타올랐다.
이 전쟁은 결국 동(冬)장군을 활용한 러시아의 전통적인 수비 방식이 효과를 발휘한 전쟁이었다. 나폴레옹은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대도시인 모스크바를 점령한 상황이니 곧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제의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자리에서 버텼으나, 그 사이에 동계장비 준비 없이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퇴각을 결정했다.
하지만 엄청난 추위로 행군 중에 수많은 병사가 동사했고, 그 뒤를 이어 코사크(Cossack) 기병대까지 출몰해 프랑스군의 뒤를 쫓기 시작하자 대육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겨우 1만 여명 만이 살아서 파리에 도달했다.
기세등등 하던 나폴레옹이 사실상 치명타를 입은 것이 확인되자 유럽 열강 6개국이 즉각적으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로 내습했으며, 대응 능력이 없던 나폴레옹은 결국 항복한 후 임시 유배지인 지중해 해안의 작은 섬 엘바(Elba)로 유배 당했다.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은 군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연구가 진행된 부분 중 하나다. 사실상 이 한 차례의 패전으로 나폴레옹은 일패도지(一敗塗地) 했으며, 의도하지 않게 결전이 되어 제국의 파멸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원정으로 사상자가 1백만 명에 달해 이 시기까지 치러진 전쟁 중 가장 피해가 컸던 전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리고 역사는 되풀이되어 히틀러 역시 역시 약 130여년 뒤 같은 수순을 밟게 된다.
사실 최근의 연구는 그의 패인이 꼭 동장군의 습격 때문 만은 아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1812년 겨울과 관련하여 폴란드나 프러시아 쪽 기록이 있는데, 이 해는 지난 15년 기간 중 비교적 따뜻한 겨울에 속했고, 퇴각을 실시했던 11~12월도 사람이 백만 명씩 얼어죽을 기후까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패인은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발생한 보급부족과 기아, 그리고 무질서한 퇴각 과정에서 적에게 추격당해 잔적격멸을 당한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보는 것이 최근의 시각이다.
즉,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배를 눈 속에 감추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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