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근대사

[1916. 12. 30] 러시아를 흔든 괴승(怪僧) 라스푸틴의 최후

라마막 2022. 12. 27. 10:37

제정 러시아의  " 괴승 ( 怪僧 )"  그리고리 라스푸틴 (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 의 생전 사진 .


 그레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Nickolai Alexandrovich Romanov, 1868~1918)와 친밀해지면서 제정 러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결과적으로는 러시아가 몰락하는 시발점을 마련했다. 사진은 1910년 경에 촬영된 것을 디지털 채색한 것이다.

: 러시아 중부 포크로브스코예(Pokrovskoye: 현재의 튜멘 주) 출신. 시베리아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897년 한 수도원에 순례를 간 것이 계기가 되어 아예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수도승 혹은 '방랑 순례자(스트라니크)'를 자처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제나 수사 같은 공식 직함이나 직위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는 1903년부터 상페테르부르크(St.Petersburg)로 여행을 하면서 사회운동가 및 종교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 사이에서 영향력이 커지자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Alexandra Feodorovna, 1872~1918)와 접견하게 되었다.

그는 1906년 말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알렉세이(Alexei)가 혈우병을 앓자 이를 치료한다면서 왕실에 들어갔다. 실제로 그는 알렉세이를 별도의 장소로 격리 시킨 후 상태를 호전 시키다가 피를 멎게 했다. 당시 왕실 어의(御醫)였던 페도로프 박사 또한 이 자리에서 라스푸틴의 "기적"을 인정했다.

"라스푸틴은 방 안에 걸어들어와 환자(알렉세이 왕자)에게 다가갔고, 그를 바라보더니 침을 뱉었다. 그러더니 출혈이 멎었다. ... 이런 광경을 봤으니 황후가 라스푸틴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라스푸틴의 "치료"를 역사 속의 미스테리 중 하나로 꼽는다. 현대 의학에서도 왕자의 혈우병이 치료된 이유를 정확히 해명하지 못하는데, 가장 근접한 해석은 그가 환자를 격리 조치 하면서 알렉세이가 적절한 휴식을 취해 면역력이 높아졌고, 라스푸틴이 치료할 것이라는 '믿음'이 심리적 스트레스를 낮추어 병이 치유된 것이 아닐까 보고 있다. 혹자는 최면 치료로 피를 멎게 했을 것으로도 보고 있으며, 전기작가인 삐에르 지라르(Pierre Gillard, 1879~1962)는 그가 아스피린 처방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보았다. 아스피린은 당대에는 진통제 정도로 쓰였고 혈액 응고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1950년대가 돼서야 발견됐는데, 라스푸틴이 아스피린의 효능을 일찍 파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궁정에서 지내며 왕가의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았고, 모든 러시아의 대소사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1906년쯤 됐을 때는 니콜라이 2세로부터 "어떤" 요청이라도 수락할 수 있는 영향력을 얻었으며, 왕실 관계자 대부분을 그의 "종교적" 추종자로 만들었다. 소문에는 그가 황후와 불륜 관계였을 뿐 아니라 그의 '비정상적으로 큰 성기'와 절륜한 정력으로 왕실 여성들을 모두 사로잡아 사실상 왕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실세가 됐다고 알려졌다.

그는 니콜라이 2세의 배후에서 온갖 권력을 휘둘러 댔으며, 차르가 1차대전 중인 1915년 러시아군을 사열 하러 수도를 비우자 황후와 궁에 남아 황제의 빈자리를 채우며 러시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그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커졌으며, 특히 정교회와 러시아 귀족 층에서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해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가 꾸며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앞서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위기를 넘겼고, 이 때문에 그의 '신비주의' 이미지가 더 강화되어 '불사신'이라는 소문이 돌게 됐었다. 1914712일에는 치오냐 구세바(Chionya Guseva, 1880~1919)라는 33세의 농노 여성이 라스푸틴을 그의 집 앞에서 습격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당시 라스푸틴은 심각한 중상을 입어 생사의 기로에 섰지만, 장기간 튜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회복되어 살아났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암살 시도는 넘기지 못했다. 19161230, 그는 복부에 세 발의 총상과 이마에 한 발을 맞고 사망했다. 그가 죽은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한데, 암살자 중 하나로 황제의 조카인 알렉산드로프나의 남편인 펠릭스 유스포프(Felix Yusupov, 1887~1967)는 훗날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건 당일날 유스포프는 라스푸틴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곧 청산가리가 든 케익과 차를 권했다. 처음에는 케익을 거절하던 라스푸틴은 곧 케익을 먹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 유스포프가 당황했다. 라스푸틴은 마데리아산 와인 한 잔을 요구해 유스포프는 다시 독을 타서 내놨지만, 이 또한 라스푸틴이 세 잔을 연거푸 마셨음에도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유스포프는 그와 새벽 2:30분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위층에 잠시 다녀온다고 한 후 위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암살 공모자들과 만났다. 두 번의 암살시도(독살)가 실패했다고 유스포프가 말하자 드미트리 파블로비치(Dmitri Pavlovich, 1891~1942) 대공은 유스포프에게 리볼버 권총을 건넸다. 유스포프는 곧 다시 아래로 내려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라스푸틴에게 일갈했다.

"저 십자가를 보고 마지막 기도나 올려시지!" 그리고 그의 가슴을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이들은 라스푸틴이 쓰러지자 그의 시체를 끌어내 라스푸틴의 집으로 실어갔고, 그가 혼자 귀가한 것처럼 알리바이를 만드는 중 갑자기 라스푸틴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유스포프 일행은 놀라서 계단으로 도망쳤다가 잔디밭으로 나왔고, 라스푸틴이 계속 쫓아오자 결국 일행 중 하나였던 블라디미르 프리쉬케비치(Vladimir M. Purishkevich, 1870~1920; 우익 정치가)가 다시 총으로 사살했다. 라스푸틴은 눈 위에 쓰러졌다. 이들은 라스푸틴이 정말 죽었는지 확인 사살을 한 뒤 천으로 싸 페트로프스키 다리까지 끌고간 후 시신을 말라야 네브카 강에 던져버렸다.

라스푸틴의 암살 소식은 금방 퍼졌으며, 경찰은 시신을 찾기도 전부터 수사에 착수했다. 여론은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가 쌓은 악명은 그대로 로마노프 왕가에게 넘어갔고, 이 때문에 그가 사라진 후 민중의 분노는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왕가로 향하게 됐다. 실제로 로마노프 왕실은 라스푸틴이 살해 당한 지 불과 수 주 후 붕괴되었으며, 왕실 가족 모두 시베리아로 끌려가 처형 당하면서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라스푸틴의 암살 배후에 영국 해외첩보부인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훗날의 MI6)가 연루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라스푸틴은 차르가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성사된다면 독일의 동부 전선이 정리되 버려 독일군이 전력을 서부로 집중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이론"의 신빙성은 낮다고 보는데, 우선 살해 현장에 누구든지 간에 영국인이 모습을 보인 바가 없으며, 현재까지도 관련 문서나 증거가 어떤 형태로든 하나라도 나온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 상당 부분은 민간에서 시작된 낭설과 정교회에서 퍼트린 이단 주장에 기반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그가 신비한 마술을 썼다는 주장, 비밀의 종교에서 내려오는 특수한 방중술로 황후와 왕실 여성들을 농락했다는 주장, 그는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는 주장,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주장 등이 있었으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그가 193cm에 달하는 거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주변 인물과 촬영한 사진에 근거한 그의 키는 180cm 전후 정도로 추정된다. 특히 그의 성적 능력에 대한 민간 구전 때문에 암살자들은 그의 시신을 해부해 성기만 따로 적출하여 방부 처리 한 뒤 박물관에 보존하기까지 했으나, 객관적인 문서 기록으로 볼 때 그는 황후와 불륜을 저지른 적도, 왕실 여성들을 건드린 적도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게는 마리아 라스푸틴(1898~1977)이라는 딸이 하나 있었으며, 그녀는 10월 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마리아는 미국에서 댄서와 서커스 단 호랑이 조련사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