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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

[1915. 1. 20] 전함 아이다호 건조 개시

라마막 2022. 12. 15. 12:04

BB-42 전함 아이다호 함.


1915년 1월 20일, 미 해군 전함 아이다호(USS Idaho, BB-42) 함이 뉴저지 주 캠든(Camden, NJ)의 뉴욕 조선 주식회사(New York Shipbuilding Corporation)에서 첫 용골(龍骨) 거치식을 가졌다. 아이다호 함은 1919년 3월 24일자로 취역한 후 미 해군에 인도됐다.


취역 직후 아이다호 함은 시험항해에 들어가 4월 13일자로 쿠바 관타나모(Guantanamo) 만을 출발했다. 그리고 이 배에는 브라질의 이피타시우 페소아(Epitacio Pessoa, 1865~1942) 대통령이 승선해 브라질까지 동행하게 됐다. 아이다호 함은 7월 6일에 닻을 올렸으며, 약 열흘 남짓 동안의 항해 끝에 7월 17일자로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도착했다. 페소아 대통령은 여기서 하선했으며, 아이다호 함은 파나마 운하로 계속 항해했다.

아이다호 함은 파나마를 거쳐 캘리포니아 주 몬테레이(Monterrey, CA)까지 계속 이동했으며, 이동 중이던 9월에 미 태평양함대와 합류했다. 태평양함대는 이동 간 해상 훈련을 실시했으며, 9월 13일에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관함식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몬테레이에 도달한 아이다호 함은 이후 5년간 평시 임무를 수행했다. 아이다호는 주로 북미와 남미 해안 위주로 활동했으며, 가끔은 남미 끝단의 칠레까지 항해했다. 또한 1923년 시애틀에서 워렌 하딩(Warren Harding, 1865~1923) 대통령 배석 하에 열린 해군 관함식 행사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에 참가했다.

1941년 5월 7일, 미 해군참모총장(CNO) 해롤드 스타크(Harold Rainsford Stark, 1880~1972) 제독은 아이다호와 자매함인 미시시피(USS Mississippi, BB-23) 및 뉴 멕시코(USS New Mexico, BB-40)함, 그리고 항모 요크타운(USS Yorktown, CV-10)을 비롯한 4대의 경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 전대를 대서양으로 전개해 중립국 감시활동을 강화하게 했다. 당시 아이다호를 비롯한 전대의 임무는 대서양을 오가는 미군 상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1941년 12월 7일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아이슬란드에 주둔 중이던 아이다호와 미시시피 함은 곧장 태평양함대에 배치됐으며, 이들은 노퍽(Norfolk, VA)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42년 1월 31일자로 일본군에게 일격을 당해 전력이 절반으로 떨어진 태평양 함대에 증원됐다.

아이다호가 참전한 첫 전투는 1943년 4월 알류산(Aleutian) 열도 전투로, 당시 아투(Attu)와 키스카(Kiska) 섬을 점령한 일본군을 척결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아이다호는 임시 구성한 순찰함대 전력의 기함으로 지정되었으며, 미 육군이 아투와 키스카에 상륙하기 전 준비사격을 실시하고 강습 상륙 간 함포 사격으로 상륙세력을 지원했다. 5월에도 다시 한 번 두 섬을 공격하기 위해 미 해군이 나섰으나 일본군은 모두 섬을 버리고 철수했으므로 아이다호 함 역시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했다.

아이다호 함은 진주만으로 모항을 옮긴 뒤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 공세에 참가하기 위해 11월 20일자로 메이킨(Makin) 산호지대에 도착했으며, 다시 12월 5일에는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로 이동했다. 1944년 1월 31일에는 콰잘린(Kwajalein)에 도착해 미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앞서 준비사격을 실시했으며, 전투 후 호주에 잠시 기항한 후에는 다시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전투, 사이판(Saipan) 전투 등에 참전했다.

아이다호가 본격적인 해전에 투입된 첫 전투는 1944년 6월 19일~20일간 벌어진 필리핀 해 해전이다. 아이다호는 공세함대와 남아 주로 병력 수송선과 물자보급선을 보호했으며, 전투 후 7월 12일에는 괌(Guam)으로 이동해 8일간 전투를 치렀다. 아이다호 함은 이후에도 과달카날(Guadalcanal), 펠렐리우(Peleliu) 전투 등 태평양 전역의 굵직한 전투에 함께했다.

아이다호 함은 1945년 3월 21일, 제 54 기동함대(TF 54)에 소속되어 모턴 데요(Morton Deyo, 1887~1973) 소장의 기함으로 지정됐으며, 일본 본토로 향하는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됐다. 아이다호는 3월 25일부터 오키나와 전역에 포격을 개시했으며, 이에 발맞춰 미 해병대는 4월 1일부터 상륙을 개시했다. 이 전투는 일본 측이 마지막 전력을 쏟아 부으며 엄청난 가미가제(神風) 돌격과 자살돌격으로 점철됐고, 아이다호 역시 전투 중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가미가제 항공기를 5대 이상 격추했다. 4월 12일에는 미처 격추하지 못한 가미가제 공격에 의한 피해와 기뢰 피해 때문에 오키나와 해역 뒤로 빠져 긴급 수리에 들어갔으며, 4월 25일에 괌에 도착해 수리를 마친 뒤 다시 오키나와에 투입되어 5월 22일까지 격전을 치렀다.

아이다호는 오키나와 함락 후 필리핀 제도로 이동했으며, 같은 해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던 순간까지 레이테(Leyte) 만에서 간단한 훈련 임무만 소화하고 있었다. 아이다호는 8월 27일 도쿄 만(東京灣)에 점령군 병력을 태우고 진입했다. 그리고 9월 2일, 일본 정부의 항복 문서가 조인되던 날 미주리(USS Missouri, BB-63) 함 옆에 전개되어 2차 대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다.

종전 후 아이다호 함은 9월 6일자로 일본에서 출발해 미 동부로 향했으며, 10월 16일에 버지니아 주 노퍽에 도착했다. 미 해군은 1946년 7월 3일자로 아이다호 함의 퇴역을 결정한 후 예비함으로 전환했으며, 1947년 11월 24일 폐선을 결정해 민간업체인 뉴욕 시의 립셋(Lipsett, Inc.)사에 매각해 최종 폐선처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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