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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1. 9] 연합군, 갈리폴리에서 철수하며 갈리폴리 전투 종료

라마막 2023. 1. 12. 14:10

1915년 1월 9일, 연합군이 갈리폴리(Galipoli) 반도에서 퇴각하면서 악명 높은 '갈리폴리' 전투가 끝났다.

1915년 4월 25일, 연합군은 다다넬스(Dardanelles) 해협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뚫을 생각으로 오토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곧 서부 전선의 참호전과 비슷한 양상이 되면서 피의 축제로 변하고 말았다.

1915년 8월 6일, 연합군은 "8월 공세(August Offensive)"를 실시하기로 했으며, 이 작전은 수블라(Suvla) 만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으로 개시했다. 하지만 보급선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병력부터 상륙시키면서 수블라 만은 처절한 살육의 현장이 됐고, 오스만 제국 군은 두 주 만에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1915년 8월, 갈리폴리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병력 철군 문제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대다수의 정치가들과 군 지휘관들은 곧 서부 전선에서 승리하여 독일을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선언하고 있었으므로, 일반 국민들은 왜 그들의 자녀들이 상관도 없는 오스만 제국의 머나먼 해안까지 가 희생 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915년 10월, 불가리아가 동맹군 측에 참가했으며, 곧 새롭게 형성된 독일-오스트리아 헝가리-불가리아의 3군 합동 전력이 세르비아로 침공을 개시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는 국토를 포기하고 철수했으며,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에 새로 전선을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강요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915년 12월부터 이런 상황 때문에 갈리폴리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갈리폴리 지역 내 오스만 군 진지 숫자와 겨울 날씨를 보면서 만약 지금 철군했다간 피해가 막심할 것으로 보았다. 영국은 이에 따라 철군에 앞서 대량의 지뢰를 지역 내에 깔았으며, 전선에 철조망을 깔아 철군 과정에서 오스만 군이 기습 공격을 가할 여지를 차단했다.

1915년 12월 20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연합군, 통칭 '앤잭(ANZAC: Australia-New Zealand Army Corps)' 병력은 수블라 만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했으며, 피해도 경미한 수준으로 입었다. 이후 1916년 1월 7일부터 오스만 군의 격렬한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튿날인 1월 8일자로 영국군이 케이프 헬레(Helles) 만에서 퇴거에 성공했으며, 1월 9일에는 대부분의 연합군 병력이 갈리폴리 반도에서 빠져나와 전투가 종료됐다.

영국군은 갈리폴리에서 35,268명의 병력과 3,689마리의 군마(軍馬), 127문의 야포, 328대의 차량과 1,600톤의 물자를 빼내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것은 수병 한 명 뿐이었으므로 이 퇴각 작전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이래 영국군이 실시한 가장 성공적인 퇴각 작전으로 기록됐다.

물론 퇴각 과정에서 입은 피해는 경미했지만, "갈리폴리 전투" 자체에서 영국군이 입은 피해는 '성공'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갈리폴리 전투 중 영 연방 군은 163,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그 중 49,500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90,000명은 질병으로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에 의무 후송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부상자 28,169명에 전사자 8,709명이 집계됐고, 뉴질랜드 군은 부상자 7,473명에 전사자 2,721명이 발생했다. 프랑스 군은 부상자 27,000명에 전사자 9,798명을 기록했으며 질병에 의한 의무 후송자도 20,000명이나 발생했다.


한편 동맹군 진영인 오스만 제국군은 부상자 164,000명에 전사자 56,000명을 기록했고, 질병에 의한 의무 후송자는 69,000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의무 후송된 숫자에서도 다시 21,000명이 끝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갈리폴리 전투는 1차세계대전 중 벌어진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 중 하나 였지만, 오늘날 이 전투는 아무 의미 없이 쌍방에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한 전투로 기억된다.

: 흔히 "전쟁 경험이 없던" 수뇌부의 대표적인 실책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계급 매관제(특정 계급에 공석이 발생하면, 하나 아래 계급자들 대상으로 경쟁 입찰을 열어 해당 계급을 판매함)를 시행했으며, 이 때문에 군 경력이나 능력과 무관한 이들이 상위 계급에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 과정에서 갑작스런 대규모 전쟁(예를 들면 나폴레옹 전쟁이나 크림 전쟁)이 발생하면 이들이 지휘권을 갖고 나갔다가 대패 하거나 전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것이 문제 시 되면서 결국 1871년 카드웰(Cardwell) 개혁을 실시해 매관제를 철폐했다(참고로,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에 매관제를 철폐한 국가다).

하지만 군 개혁을 실시한 뒤에도 문제가 뒤따랐다. 영국은 크림 전쟁(1853~1856) 이후 이렇다 할 대규모 전쟁을 겪지 않았고, 그렇게 반 세기 가까이 지나면서 '경험'과 '능력'이 있는 장교보다는 귀족 계층 혹은 행정 능력이 있는 이들 위주로 진급이 이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겪은 첫 대규모 전쟁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투 경험이 일천한 지휘관들은 '갈리폴리 전투'나 '경기병의 돌격' 사건 같은 지휘 실책을 연달아 일으켰고, 이에 따라 불필요한 희생만 크게 야기됐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한 번 진급 체계를 대대적으로 수정했으며, 그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치르게 된 것이 제 2차 세계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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