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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12. 11] 美, 캠프 로건 흑인병사 반란사건 주모자 13명 교수형 집행

라마막 2022. 12. 12. 11:35

1919년 7월 27일, 시카고 인종 폭동사건(Chicago Race Riot) 당시 미국 민병대원 하나가 흑인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와 길 한가운데서 대립하고 있는 모습.

 

1917년 12월 11일, 13명의 흑인 미국인이 캠프 로건(Camp Logan) 반란 사건 후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1917년 휴스턴 반란사건으로 불린다.


1917년 4월,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미 전역에 신규 군 기지를 여러 곳에 건립했다. 캠프 로건은 텍사스 중 휴스턴에 건설한 신규 기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던 중인 1917년 7월 27일, 미 제 24보병연대 3대대가 캠프 로건 건설 현장에 대한 관리감독 및 방호임무를 부여 받았다. 해당 연대는 특별히 "전원 흑인"으로 창설한 부대였다. 이는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린 조치가 아니라, 당시 흑인과 백인은 분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원 흑인으로 부대원을 구성한 것이었다.


명령 직후 이 흑인 부대는 휴스턴에 도착했고, 당연히 현장 관리 과정에서 현지인들과 충돌했다. 당시 미 남부에서는 흑백인종 분리가 거의 '자연스러운 삶'이었으며, 화장실, 식당, 자동차 이용, 하다못해 수도꼭지 사용까지 모두 인종을 분리시키고 있던 때였다. 결국 1917년 8월까지 24연대 3대대원들은 현지 주민들과 계속 충돌했다. 출동한 경찰은 오히려 주민 편을 들며 이들에게 인종차별적 모욕을 서슴치 않았으며, 현지 주민들이 이들에게 인종차별적인 언사와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손대지 않고 방관했다. 당시 이 흑인 부대원들은 남부의 '관례'인 인종 분리 정책을 군말없이 받아들였으며, 화장실부터 자동차까지 백인들과 분리하라는 요구를 조용히 수용했다. 하지만 한 사건이 이들의 인내력을 한계에 다다르게 했다.

1917년 8월 23일, 두 명의 흑인 병사가 휴스턴 경찰 소속 백인 경관인 리 스팍스(Lee Sparks)와 루퍼스 대니얼스(Rufus Daniels)에게 체포된 뒤 폭행을 당했다. 체포 명목은 이들이 현지 흑인 여성인 새라 트레버스(Sara Travers)로부터 들어온 신고 내용을 확인한다는 이유였다.

이 소식이 캠프 로건의 3대대원들에게 알려지자 이들은 드디어 폭발했다. 인내력이 한계까지 다다른 대원들은 휴스턴 시내로 나가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156명의 흑인 병사들은 비다 헨리(Vida Henry) 병장의 지휘로 시내에 나갔으며, 소총을 든 상태로 동네를 돌면서 가택과 건물, 차량 등에 난사했다. 폭동에 가담한 병사들은 휴스턴 경찰서 앞까지 이렇게 행진 했으며, 결국 도로 한 가운데에서 문제의 경찰 병력과 충돌했다.

두 집단은 1917년 8월 23일, 휴스턴 시내에서 정면으로 맞붙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해자였던 루퍼스 다니엘스를 포함한 4명의 경관과 1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경관 한 명 역시 이날 부상을 입었으나 수일 뒤 치료 중 사망했다. 3대대 쪽에서는 네 명의 흑인 병사들이 사망했으며, 훗날 부검 결과 모두 우군 사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충돌 다음 날 병사들을 지휘한 비다 헨리 병장은 자살했다.

이튿날, 휴스턴 주 정부가 개입해 사건을 정리했으며, 3대대원들은 모두 무장 해제된 뒤 휴스턴 시외로 쫓겨났다. 이 사건으로 백인 경관이나 민간인 중에서는 기소된 이가 한 명도 없었지만, 흑인 병사들 중에서는 64명이 군법 재판에 회부되었기 때문에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법 재판이 되었다.

이후 2개월간 169명의 증인이 불려와 이 날의 총격전을 증언했으며, 병사들의 재판은 1917년 11월 1일부터 시작됐다. 재판은 22일간 진행됐으며, 배심원들의 판단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3명의 병사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41명에게는 종신형이 내려졌다. 재판소는 이들의 탄원을 접수하지 않았다.

1917년 12월 11일 오전 7시 17분, 13명의 병사들은 동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12월 17일, 다시 군법재판이 열려 5명의 흑인 병사에게 추가로 사형을 선고하고 10명에게 종신형을 내렸다. 세 번째 재판은 1918년 3월에 열려 11명의 병사에게 추가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12명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은 "무법적인 폭동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이미 적절하게 환기된 것 같다"고 언급한 뒤 사형을 선고 받은 16명의 병사 중 10명에게 대통령 직권을 행사해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1919년 9월 29일, 결국 5명의 흑인 병사에게 추가로 교수형이 집행됐고, 한 주 뒤에 다시 여섯 명이 처형됐다. 캠프 로건 반란 사건으로 처형된 흑인 병사는 총 19명이었으며, 앞서 언급했듯 백인 경관이나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추가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이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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