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1차세계대전사

[1917. 12. 12] 반세기 뒤에야 밝혀진 모단(Modane) 열차 충돌 사고

라마막 2022. 12. 13. 15:46

 

1914년, 전선으로 떠나기 전 덩키르크(Dunkirk) 기차 역 앞에 도열한 프랑스군 병사들.
1917년 12월 12일, 모단(Modane) 열차 충돌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 군 병사 약 700명이 사망했다.

1차 세계대전 중 열차는 병력 및 장비 수송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개전 후 상당 수의 국가가 수송수단과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노후한 열차까지 다시 투입했다. 열차는 대부분 동력에 비해 물자를 과적으로 싣고 달렸으며, 이 때문에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1917년 12월 12일, 카포레토(Caporetto)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이 패퇴하자 프랑스 제 12 집단군 소속 병사 약 1,000명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증원을 갔다가 프랑스로 다시 귀환하기 위해 집결했다.

이들 병사는 우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랑스 리옹까지 두 대의 기차로 이동시키기로 했으나, 실제 가용한 기차는 한 대 뿐이었다. 이에 지휘부는 한 대의 기차에 두 열차 분 객차를 이어 19대를 연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각 객차마다 완전무장 병력이 가득 탄 상태에서 한 대의 기차가 끌 수 있던 중량 한계는 그 1/4에 불과했다. 객차는 앞에 연결된 세 대에만 자동식 에어브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만약 열차가 급정거라도 했다간 대형 사고가 불보듯 뻔했다.

기관사는 이대로 달렸다가는 문제가 될 것을 뻔히 알았으므로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만약 평시였다면 기차가 가느냐 마느냐도 그의 권한 안에 있었겠으나, 이 때는 전시였고, 군은 그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기관사는 할 수 없이 협조했다.

병력을 실은 기차는 이탈리아-프랑스 국경의 알프스 산맥을 통과해 급경사 구역에 들어섰다. 기차는 모단에서 국경을 넘어갔으며, 그 직후 경사가 급한 계곡이 나타났다. 기관사는 감속을 위해 브레이크를 작동했지만 뒤에 달린 객차의 무게가 무거워 브레이크가 견디지 못했다. 브레이크는 곧 과열됐으며, 객차 아래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차량 하부에 화재가 발생했다.

열차는 계속 불붙은 상태로 20km 이상 계곡 길 아래를 질주했으며, 브레이크를 걸었음에도 가속이 붙어 120km/h까지 속도가 올라갔다. 이미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객차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므로 몇 몇 병사가 창 밖으로 뛰어 내려버렸다.

열차가 생 미셸드모리엥(St. Michel-de-Maurienne) 마을에 들어설 무렵 첫 객차가 탈선했고, 뒤 따르던 객차들이 전부 엉키면서 연쇄 충돌했다. 그리고 차량 하부의 화재가 더 크게 번졌다.

대규모 진화 작업과 구조작업 후 총 424구의 프랑스 병사 시신을 확인했으며, 135구의 시신은 신원 확인조차 불가능 했다. 37구의 시신은 열차 길을 따라 발견됐으며, 아마도 충돌 직전에 열차에서 뛰어내렸던 병사들로 추정됐다. 100여 명의 병사는 중경상을 입은 채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어 15일 이상 치료를 받았다.

사고 정리 후 최종 집계로 약 700~1,000명의 병사가 열차 안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했으며, 이튿날 점호에 나타날 수 있던 병사는 불과 183명에 불과했다.

모단 열차 충돌 사고는 사실 이탈리아-프랑스 군이 사전에 조금만 안전 조치에 관심을 가졌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인재(人災)였다. 이 사건 직후 프랑스 군부는 이 사고 내용 자체를 수 년 간 기밀로 분류한 후 은폐했다.

이 사고에 대한 사실은 1972년 한 프랑스 일간지가 폭로하면서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사고로부터 55년 뒤의 일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