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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마지막 사진

라마막 2022. 11. 30. 23:29

독일제국의 마지막 카이저, 빌헬름 2세.

1940년, 네덜란드 도른(Doorn)의 자택에서 애견과 함께 촬영된 81세의 전(前)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의 모습.

1918년 11월 9일, 빌헬름 2세는 1888년 즉위 후 내내 지위를 지켜왔던 독일 황제("카이저") 자리를 내놓고 퇴위했다.


1918년 11월 3일, 독일 킬(Kiel)에서 발생한 제국 해군의 수병 반란으로 야기된 독일 혁명이 성공하면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독일 대공자이자 수상이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Max von Baden, 1867~1929)은 11월 9일 정오를 기해 황제의 동의없이 빌헬름 2세의 퇴위를 발표했으며, 그 역시 곧이어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바덴은 후임으로 사회 민주당 당수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71~1925)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빌헬름 황제는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 1867~1939)참모총장이 찾아와 더 이상 독일 육군이 황실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알리고, 곧이어 황제의 평생에 걸친 충신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원수가 퇴위를 권유하자 겨우 이를 받아들였다.

이튿날인 11월 10일, 왕위를 내려놓은 빌헬름 전 황제는 기차를 타고 네덜란드로 망명 길에 올랐다. 그는 처음 아메롱헨(Amerongen)에 정착했으나 얼마 후 도른에 저택을 구입하면서 다시 이주했다. 그는 도른의 저택 외에도 그리스 코르푸에 별장을 한 채 더 구입했으며, 두 번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1919년 6월 28일, 1차 세계대전을 종결 지은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 내용에 빌헬름 2세를 기소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를 넘기라는 연합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빌헬름 2세는 망명 생활 중 취미로 사냥을 다녔고, 숲 속에서 나무 베기를 즐겼다. 그는 그리스 코르푸에 있는 동안 고고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22년 황제 제위기간을 회고하는 회고록을 냈으며, 이 책에서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같은 해에 퇴위 4주년을 맞아 헤르미네 로이스 폰 그라이츠(Hermine Reuss von Greiz, 1887~1947) 공주와 재혼했다.

빌헬름 2세는 1941년 6월 4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죽은 날은 독일군이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으로 쳐들어가기 불과 한 주 전이었다. 히틀러는 빌헬름 2세를 경멸했지만 그의 사후 시신을 다시 독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으며, 장례 역시 국장으로 치르고자 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죽어서 조차" 절대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므로 가족들은 그 뜻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빌헬름 2세의 시신은 도른의 자택에 묻혔으며,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소규모 군 부대가 장례 예우를 했다. 빌헬름은 자신의 장례식에 나치 독일의 '비틀린 십자가(스와스티카)'가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했으나 나치 독일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 본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르 알베르트(Freidrich Wilhelm Viktor Albert)이며, 1888년 6월 15일에 즉위하여 30년간 제위에 있었다.

그는 재위 초기부터 군사력 강화에 집중해 강력한 해군을 구축했고, 독일 제국의 입지를 강화해 유럽 주요 열강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 눈치없는 발언을 일삼은데다 외교정책 방침이 변덕스러웠기 때문에 불필요한 적을 많이 만들었다. 이는 특히 1차 세계대전 발발의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1914년 위기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1차 세계대전에 함께 말려들게 됐다는 사실이다. 막상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전략과 조직에 관련된 모든 결정을 미루었으며, 문자 그대로 독일 총참모부에게 전부 일임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그가 무책임하게 권한을 위임한 것은 사실상 군부독재의 길을 연 셈이 되었다.

사실 1차 세계대전 자체는 독일군이 러시아 영내로 침공하면서 연승하고 있었고, 동유럽의 큰 할을 점령한 상황이었으나 1918년 가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결전 한 번에 무너지면서 사실상 그간 점령한 영토를 모두 내주게 되었다. 이 한 번의 패배가 군과 지지자들을 황실에서 대거 이탈시켰으며, 결국 수병반란으로 시작된 불씨가 도화선이 되어 독일 혁명으로 비화됐기 때문이다.

그는 퇴위를 강요 받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온전히 네덜란드로 망명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 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됐다가 무너지고, 다시 나치 독일이 성립되어 1938년부터 유럽 전토를 불사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갔을 때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도른에서 지내다가 1941년에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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