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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37. 1. 28] 제 1차 상하이 사변 발발

라마막 2023. 1. 2. 12:31

1937년  1월 ,  상하이 ( 上海 )  전투 중 원형으로 기관총 진지를 만들어 방어 중인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 國民革命軍 , National Revolutionary Army)  병사들의 모습 .

 상하이 전투는 중국 국민혁명군이 일본을 상대로 치른 22회의 대 회전(會戰) 중 하나로, 사실상 중일전쟁의 초전과도 같은 전투였다. 특히 국민혁명군은 70개 사단 75만 명, 일본은 9개사단 30만 명을 투입한 대 전투였기 때문에 훗날 사가들은 이 전투를 "양쯔강(陽子江)의 스탈린그라드"라 일컫는다. 또한 사실상 2차 세계대전의 핵심 교전국가 간의 충돌이었기 때문에 이 전투가 2차 세계대전의 본격적인 시발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은 이미 1931년에 만주를 침공한 뒤 1932년 상하이를 한 차례 침공했다. 쌍방의 긴장은 1937년 노구교(蘆溝橋) 사건(혹은 서양에서는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으로 증폭됐으며, 일본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공을 개시했다. 일명 1차 상하이 전투(혹은 1,28 사변)는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승패가 나지 않은 상태로 휴전했으나 이미 중-일 간에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차 상하이 전투는 89일에 촉발된 "오야마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군 해군 육전단의 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 중장이 홍커우 공원까지 차로 달리던 중 국민혁명군 경비병이 저지를 하자 오야마 장군이 경비병을 사살했고, 이에 국민혁명군이 대응사격을 하면서 오야마 장군이 사살됐다. 문제는 홍커우 공항을 이용하는 것이 1932년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내용이라는 점인데, 현재까지도 왜 오야마가 이를 위반하면서까지 홍커우 공항을 이용하려고 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쌍방의 긴장 수위가 높아지던 중 일본이 상하이에 병력을 증파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국민혁명군도 811일까지 상하이 주둔병력을 증강하면서 사실상 충돌 상태가 조성됐다. 이에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대표가 중-일 간 휴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화민국의 위흥쥔(俞鴻鈞, 1898~1960) 상하이 시장이 일본의 조건을 거절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서로가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개전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전반적으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훈련 상태가 중국 국민혁명군에 비해 높았다. 쌍방은 서로가 모두 독가스 등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어느 쪽도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사진은 시가전 중인 일본 해군 육전대. / Public Domain

결국 상하이 전투는 1937813, 상하이 외곽의 자베이(閘北)에서 양군이 소규모 충돌을 일으키면서 발발했다. 국민혁명군은 숫적으로만 두 배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으나 사실상 전황 자체는 시작 전부터 절망적이었는데, 우선 항공력 자체가 없다시피해 일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시작했고, 장비하고 있던 무기는 대부분 소구경 화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최대한 시간을 지연하면서 서방 국가의 증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에 국민혁명군은 적극적으로 단독 대응을 시작했는데,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고 저항을 포기할 것으로 판단했던 일본 측 진영은 국민혁명군의 대응에 크게 놀랐다. 이 때문에 전투는 3일만에 끝날 것이라고 공언했던 일본군의 주장과 달리 3개월 16일동안 이어졌으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데 3개월이면 충분하다던 주장도 함께 깨졌다. 국민혁명군이 승산이 희박한 상황에서 굳이 상하이 결전을 택한 이유는 중화민국 정부가 주요 기간산업을 내륙으로 이동시킬 시간을 벌고, 일본이 명분없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을 서방 국가들이 인지하도록 하여 이들의 동조를 끌어낼 계산이었다.

전투는 3단계로 진행되면서 쌍방 도합 백 만 가량이 투입됐다. 1단계는 813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는 국민혁명군이 전투 주도권을 쥐고 일본군을 상하이 시내에서 축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823, 일본군이 장수성 해안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면서 전황이 뒤집혀 국민혁명군이 수세로 돌아섰으며, 이 때부터 상하이와 외곽지역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이를 방어하는 국민혁명군 간에 '스탈린그라드' 같은 처절한 도시 공방전이 펼쳐졌다. 3단계는 1027일 일본이 국민혁명군의 측방 공격을 시작하면서 개시됐으며, 사실상 승기를 놓친 국민혁명군은 최대한 병력을 철군시켜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南京)을 방어하고자 시도하면서 종료했다.

패색이 짙어진 국민혁명군 중앙사령부는 118일자로 상하이 전선의 전면 퇴거를 명령하고 인근 외국계 조계로 진입해 방어선을 펼쳐 일본군의 난징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투력이 소진된 국민혁명군의 방어선은 물자가 떨어짐에 따라 방어선이 붕괴했으며, 113일자로 방어선을 한 차례 물러 다시 설치했지만 일본군 저지에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방어선 형성을 위해 진입한 지방 도시의 관리들은 다 도망치고 난 뒤라 물자를 보급받기도 어려운 기괴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결국 국민혁명군의 2차 방어선도 1119일자로 일본군에게 돌파당했으며, 시쳉 지역에 3차 방어선을 한 차례 더 설치했지만 이 또한 1126일자로 돌파되면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가 "중국판 힌덴부르크 방어선"으로 명명하면서 조성했던 대규모 요새 시설은 단 두 주 만에 함락됐다. 이렇게 상하이 전투는 사실상 종료하면서 국민혁명군은 중앙군은 붕괴했으며, 이 전투는 121일부터 더 큰 희생과 비극을 불러온 난징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국민혁명군은 이 두 전투에서 20만 명 가까운 정예군을 상실했으며, 일본군은 상하이와 난징 지역을 장악하면서 중국대륙 침공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국민혁명군을 격려 중인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의 부인 숭메이링(宋美齡, 1898~2003) 여사. 2차대전 개전 전 독일군으로부터 구입한 철모가 독특하다.

일본군은 두 지역 점령 후 포로로 잡은 국민혁명군 병사 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대량 학살하면서 최대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강간, 약탈행위까지 저질러 훗날 도쿄 전범재판에서 중요한 전쟁범죄 사례로 다루어지게 된다.

한편 이 곳에서 주력군을 상실하고 전력에 크게 타격을 입은 장제스는 이 시기부터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피하게 되었으며, 최대한 내륙으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작전한계점까지 도달시킨 후 소모전으로 전력을 꺾겠다는 방침으로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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