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5. 6. 27] 적들조차 인정한 일본의 마지막 명장,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

라마막 2023. 1. 6. 10:03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

 

2차 세계대전 및 태평양전쟁의 종장 중 하나인 오키나와(沖縄) 전투에서 방자(防者) 측인 일본군을 지휘한 우시지마 미쓰루(牛島 満, 1887~1945) 중장의 모습. 그는 압도적인 열세의 상황에서 지구전으로 대응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지연전에 말려들면서 오키나와 제도 점령에 2개월이 걸렸을 뿐 아니라 사상자도 35,000명 이상이 발생했다.

가고시마(鹿児島) 태생인 그는 사쓰마 번(薩摩藩) 무사였던 부친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이 현대화 된 군대를 설치하자 부친 또한 초창기 일본군에서 장교 생활을 했다. 그는 성년이 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20기로 입교했으며, 1908년에 졸업하여 육군대학에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장)나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대장) 등과 함께 28기로 입교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소장 계급(한국군의 준장 해당)을 달고 있던 그는 일본 제 36여단을 지휘했으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가고시마 주둔 제 45연대장으로 보직되어 중국 북부 산해관(山海关)으로 진격했다. 그는 6사단 휘하에 배속되어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국민혁명군 정예부대인 제 14군과 격돌했으며, 이후에는 시좌좡(石家庄)을 거쳐 상하이(上海) 전투에 투입되어 대규모의 국민혁명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그의 여단은 난징과 우후를 거쳐 우한(武漢)까지 진출했으며, 1939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112, 일본 대본영이 진주만 공습을 결정하려 할 때 그는 적극적으로 대미(對美) 개전에 반대했는데, 미국까지 적으로 돌렸다가는 전쟁만 길어지게 되므로 중국 전선에 집중해야 하며, 쓸데없이 미국을 상대로 기운을 빼다가 소련에게 패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결국 한직으로 좌천된 그는 한동안 후진 양성에 힘썼으나,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120,000명으로 신규 창설한 일본 제 32군 사령관으로 보직되어 류쿠(琉球) 제도(: 오키나와의 옛 이름)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사실상 패전이 임박해오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로 좁혀오는 미군을 상대로 오키나와를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민간인들부터 퇴거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1,600명의 민간인이 탑승한 쓰시마마루(対馬丸)가 미군 폭격으로 격침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대혼란 속에서 약 8만 명을 오키나와 밖으로 퇴거시켰고, 야에야마(八重山) 열도에서도 3만 명을 피신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북부에서는 민간인을 거의 퇴거시키지 못한 상태로 미군의 침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장인 야하라 히로미치(八原博通, 1902~1981) 대좌가 입안한 종심방어전술을 채택했으나,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차석 지휘권자인 초 이사무(長 勇, 1895~1945) 중장에게 지속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초 중장의 의견을 채택해 미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지만 거의 학살극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슈리(首里) 방어선까지 돌파당했다. 이에 우시지마 장군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 최 남단으로 퇴거하여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협조된 방어가 불가한 상황이 됨에 따라 조율된 '방어선'이 구축되는 대신 진지 별로 따로 저항하는 상황이 연출 됐으며, 진지들이 하나씩 격파당하자 우시지마 대장과 초 중장은 남부 해안의 89고지로 이동했다가 결국 고립 당했다. 이 상황이 되자 다수의 일본군 병사들이 미군에 항복했으며, 특히 오키나와에서 강집 당한 오키나와 출신 병사들이 대량으로 미군에 투항하면서 일본군의 사기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편, 이들을 상대하던 미군 측의 지휘관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지휘관으로 활약하다가 포트 도널슨(Fort Donalson)에서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에게 항복했던 사이먼 볼리바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Sr.)의 아들인 사이먼 볼리바 버크너 주니어(Simon Bolivar Buckner, Jr. 1886~1945) 중장이었다. 버크너 중장은 우시지마에게 항복할 경우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우시지마는 항복을 거부했으며, 결국 89고지까지 함락 당할 상황이 되자 우시지마 장군은 초 장군과 둘이 할복 자살을 선택했다. 우시지마 장군의 할복은 대장으로 진급이 결정된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오키나와 전투 중 미군에 항복하고 있는 일본군 병사의 모습.

결국 잔여 일본군을 이끌고 미군에게 항복한 것은 참모장인 야하라 대좌였는데, 그는 최초 우시지마 대장과 함께 할복하겠다고 요청했으나 우시지마는 이를 기각하며 "만약 자네까지 죽는다면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전할 사람이 없네. 잠시 동안 살아남는 치욕을 견뎌라. 그것이 사령관의 마지막 명령이다."라고 말했다. 훗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야하라는 <오키나와 전투>라는 제목의 책을 냈으며, 이 책에 우시지마 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다.

한편 이들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한 미군은 1945627, 이들이 마지막으로 할복한 동굴 인근에 정중하게 매장했다. 우시지마는 생전 인격자로 평가 받았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상사들에게 맞선 인물로 존경 받았다. 또한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해 항상 평온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한다. 훗날 미국의 전쟁 역사가인 핸슨 볼드윈(Hanson W. Baldwin)은 우시지마 미쓰루 장군을 "태평양 전쟁 기간 중 가장 훌륭했던 일본군 장성"으로 평가했다.

[위에 언급된 미측의 사이먼 볼리바 버크너 장군도 기구한 운명이었는데, 우시지마에게 항복을 제안한 직후 일본군 야포에 희생되어 전사했다. 그는 레슬리 맥네어(Leslie McNair), 프랭크 맥스웰 앤드류스(Frank Maxwell Andrews), 밀러드 하몬(Millard Harmon) 중장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중 미측에서 전사한 최고 계급자가 됐다. 그에게는 사후 대장 계급이 추서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