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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1. 3] 미국 내 최대의 스파이 조직 '두케인 스파이 조직' 검거

라마막 2023. 1. 4. 00:10
검거된 33명의 두케인 조직원들. 첫 줄 맨 오른쪽이 리더인 프레드릭 두케인이다. / Public Domain

<오늘의 역사> 1942. 1. 3

1942년 1월 3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독일군 스파이 조직원 33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일명 두케인(Dusquene) 스파이 조직으로 알려진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제각각 미국에 대한 첩버 활동을 수행해왔다. 그 중 한 명은 항공사에서 근무하며 연합군 함정이 대서양을 건널 때마다 독일에 알렸으며, 다른 한 명은 산업계 및 군과 관련된 기밀을 수집해 서면으로 독일에 보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윌리엄 세볼드(William G. Sebold, 1899~1970)는 FBI가 이중 간첩으로 활용하던 인물로, 이들 조직에 대한 스파이 활동 증거를 비밀리에 수집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프레드릭 주베르트 두케인(Frederck Joubert Dusquene)이라는 자가 총책을 맡고 있었으며, 미 역사상 미국 내에서 검거된 사상 최대규모의 간첩 조직이었다.

이들 33명은 도합 300년 형을 받았다. 그 중 19명은 FBI에게 체포되자 마자 유죄를 인정했으며, 나머지 14명은 뉴욕 시로 압송되어 배심원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프레드릭 두케인은 2차 보어전쟁 참전용사 였으며, 1차대전 때에도 독일군의 첩보원이 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첩보활동을 한 적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 때부터 여러 차례 체포되었지만 수차례 감옥을 탈옥하여 악명이 높았다.

: 33명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유사시 사보타주를 행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한 명은 시내에 레스토랑을 열고 손님들의 대화로 정보를 얻었고, 한 명은 배달부로 일하면서 중요 우편물의 이동 등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앞서 언급된 윌리엄 세볼드는 처음부터 독일에 약점을 잡혀 스파이가 됐던 인물이며, FBI가 회유하자 스스로 다른 33인의 스파이 증거 수집을 도왔다. FBI는 2년 가까이 단파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면서 이들이 무슨 정보를 독일에 보내고 있고, 또 역으로 독일이 어떻게 이들을 통제하는지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세볼드의 활약이 두드러져 훗날 방첩 공작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 33인이 검거된 사건은 훗날 독일의 정보기관 책임자 조차 "독일 스파이 활동에 사망선고를 한 사건"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며, 당시 FBI 국장을 역임하던 제이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 국장 역시 크게 만족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네트워크 검거작전'이라 자평했다.

: 리더이던 두케인은 대위로 보어전쟁에 참전했으며, 영국군에게 두 차례, 포르투갈에 한 차례 체포됐지만 매번 탈옥에 성공했다. 특히 그는 '키체너 백작의 킬러'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영국군의 핵심 인물이던 호레이쇼 허버트 키체너(Horatio Herbert Kitchener, 1850~1916) 백작이 1916년 러시아 방문을 하던 당시 그가 승선한 햄프셔(HMS Hampshire) 함을 침몰시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검거작전에 결정적 공훈을 세운 윌리엄 세볼드.

두케인은 1934년 미국계 친 나치계 조직인 '제 76 기사단(Order of 76)'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듬해부터 뉴딜의 일환으로 설치된 정부기관인 노동진전국(Workers Progress Administration: 일자리 찾아주던 기관임)에 취업했다. 독일은 독일방첩국(Abwehr)의 니콜라우스 리터(Nikolaus Ritter, 1899~1974) 대령을 미국 내 작전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그는 앞서 포섭한 윌리엄 세볼드를 뉴욕으로 보내 두케인과 만나게 한 후 단파방송국을 설립해 독일과 교신하게 했다.

하지만 이중간첩이던 세볼드는 이 사실을 FBI에 알렸고, FBI는 두케인이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그의 활동을 감시하며 증거를 수집했다. FBI는 에드먼드 뉴커크(Edmund Newkirk)라는 요원을 배정해 두케인의 하숙집 윗층을 빌린 뒤 도청을 시작했다. 하지만 뉴커크는 생각외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는데, 이는 한평생 스파이로 살아온 두케인이 워낙 다양한 보안 기술을 익힌데다 조심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를 미행하면 두케인은 일반 열차를 타다가 갑자기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임의의 역에서 일반열차로 갈아탄 뒤 가까운 건물 회전문을 괜히 한 바퀴 돈 다음 안으로 진입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윗층으로 올라갔다가 계단으로 다시 내려온 후 앞서 들어온 문과 다른 문으로 건물을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두케인은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심지어 한 번은 미행 중인 FBI 요원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만 따라다니라고 한 적이 있다고 훗날 뉴커크 요원이 증언했다.

그는 체포 후 캔자스 주 레벤워스(Levenworth) 연방 교도소에 수감됐으며, 다른 수감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14년간 복역한 뒤 1954년에 건강 악화로 석방됐으며, 얼마 후 웰페어 섬(현재의 뉴욕 시 루즈벨트 섬)의 한 병원에서 1956년 5월 24일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한편 이들을 독일에서 통제한 니콜라우스 리터는 33명의 스파이가 생포되어 위태로운 입장이 됐지만 정보 책임자이던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1887~1945) 제독이 그를 옹호하며 "그간 미군의 방독면이나 원격조종 장비, 밀폐형 연료탱크 설계 등 다양한 귀중한 정보를 취득해 온 성과와 공로"가 있다고 해 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어 공군으로 전군됐으며, 1944년 말까지 하노버 등지의 독일 본토 방공부대 책임자를 지냈다. 그는 독일에서 거주하다 1972년 <코드명 닥터 란차우: 비밀 정보국 장교 니콜라우스 리터의 노트(Deckname Dr. Rantzau; die Aufzeichnungen des Nikolaus Ritter, Offizier im Geheimen Nachrichtendienst)>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그는 197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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