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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1. 12. 7] 일본, 진주만 공습 개시...미국의 2차세계대전 본격 개입

라마막 2022. 12. 8. 10:47

1941년 12월 7일,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을 야기한 '진주만 공습'이 벌어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공습 직후 "앞으로 오늘은 치욕으로 기억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이라 언급했으며, 이 사건으로 전쟁 불개입을 표방하던 미국은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미 정부는 일본이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한 후 중국과 동남아 일대로 영토를 팽창하자 중일전쟁 이전 영토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이 끝끝내 거부하자 미국은 국내 일본 자산에 대한 동결과 강철 및 유류에 대한 엠바고(embargo) 조치에 돌입했다. 영토가 팽창한 상태에서 유류가 제한 받을 경우 치명타가 될 것이라 판단한 일본은 "어차피 격돌할 수 밖에 없는 미국에" 선제공격을 결심했으며, 이에 따라 우선 태평양에서 충돌하게 될 태평양 함대부터 기습 선제공격으로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대본영은 만약 미 해군이 선제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면, 일본은 미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동안 태평양 권역에서 팽창해 필요한 자원을 최대한 확보할 것이며, 철, 고무, 석유 등이 충분히 확보되고 나면 미국과도 붙어볼 만 할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 역시 정보계통을 통해 일본이 미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난 뒤 미국에 선제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징후를 포착했지만, 정확한 공격 지점을 특정하지 못하고 필리핀 수빅 만의 클라크 기지나 알류산 열도를 통한 알래스카, 하와이 중 한 곳이 목표일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사실 접근성 때문에 하와이가 목표일 가능성은 낮게 보았으며, 일본과의 거리 등을 고려할 때 필리핀을 가장 유력한 지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와이 현지시간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48분, 하와이 인근 북방에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 1887~1944) 중장의 기동함대가 도착하면서 항모에 탑재된 함재기들이 진주만 공습을 개시했다. 주말이었기 때문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미 해군은 허를 찔렸으며, 네 척의 전함이 그 자리에서 침몰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아이잭 키드(Issac C. Kidd, Sr., 1884~1941) 소장은 애리조나(USS Arizona, BB-39) 함 함교에서 일본군 공격에 대응했지만 일본군 함재기의 폭탄 하나가 함교에 명중하면서 미측의 첫 장관급 전사자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는 전쟁으로 졸업을 한 학기 당긴 애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일주일 뒤 임관 예정이던 아들 아이잭 키드(Issac C. Kidd, Jr., 1919~1999/대장 예편, 레이건 행정부 때 미 대서양함대 사령관 역임)의 졸업식 참석을 위해 이튿날부터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공습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허스밴드 킴멜(Husband E. Kimmel, 1882~1968) 대장은 망연자실하게 집무실에서 공습을 지켜봤으며, 그 과정에서 폭탄 파편이 집무실로 날아오자 옆에 서 있던 부관이 몸을 날려 그를 구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차라리 방금 그게 날 죽였으면 좋았을 것을"이라 울부짖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양동작전으로 영령(英領) 홍콩과 말라야, 싱가포르, 그리고 미국령 필리핀을 동시에 공격했다. 특히 일본은 이 선제공격으로 동남아 지역을 석권하면서 영국을 동남아권에서 축출 했으며, 당분간 필요한 자원도 대부분 확보해 한동안의 전쟁 지속능력을 얻었다.
 
 
미국은 이 날 약 한 시간 남짓한 공습 피해로 2,400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에는 민간인도 적지 않았다. 앞서 침몰한 네 척의 함정 중 세 척은 완파됐으며, 이날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여덟 척의 전함이 반파됐다. 그 외에도 순양함 세 척과 구축함 세 척이 파손됐고, 항공기 188대가 파괴됐으며 159대가 파손됐다. 특히 항공기는 기습 때문에 대부분의 기체가 이륙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이 날 전사자는 2,355명으로 집계됐으며, 민간인은 68명 사망에 35명이 부상을 입었고, 민간 항공기도 3대가 격추 당했다. 사실상 태평양함대가 하루아침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항모 세 척이 모두 훈련을 위해 인근 해역으로 나가 있어 피해를 입은 함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세 척의 항모는 태평양함대가 재건하는 과정에서 함대의 중심 함정으로 새롭게 떠오르게 된다.


미국은 앞선 1941년 초부터 "렌드-리스(Lend-Lease)"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사실상 중립주의를 버리고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으나, 어느 국가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전쟁 자체에 개입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서반구" 문제에만 개입하고 유럽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오랜 중립주의 성향 때문에 루즈벨트가 여론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던 이유가 컸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오히려 여론이 하루 사이에 추축국에 대한 개전을 요구했고,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이 미국-영국을 상대로 날린 선전포고장이 도착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바로 이튿날 의회로 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선언을 요청했다. 의회는 곧바로 요청을 수락해 일본-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날렸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에 최종 서명하면서 미국은 본격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기습은 일시적으로 미국의 전력을 꺾어버려 일본이 한동안 태평양에서 확장할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이는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을 간과한 계산이었다. 일본 정부가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있을 당시, 선제공격이 성공하면 일본에게 승산이 있겠냐는 다카마스노미야 친왕(高松宮宣仁親王, 1905~1987)의 질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제독은 "한 3년 정도는 설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미 주미 일본무관을 지내면서 미국의 공업력을 알고 있던 그는 태평양함대가 3년 정도면 재건하리라 파악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 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 한 일이 결국 거인의 콧털을 뽑아 잠에서 깨운 것이나 아닐지 걱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끔찍한 결과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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