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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1. 12. 7] 일본 정부로부터도 이용당한 주미 하와이 일본대사, 노무라 제독

라마막 2022. 12. 8. 00:56

1941년 11월 14일, 주미 일본대사였던 기치사부로 노무라(野村 吉三郎, 1877~1964) 제독은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미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일본 정부에는 미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해 융통성 없는 "데드라인"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던 당시의 주미 일본대사. 와카야마(和歌山)현 출신으로, 일본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 26기로 입교하여 1898년 57명의 사관생도 중 2등으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00년 1월에 소위 계급을 단 그는 전함 미카사(三笠)에 배속되어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러-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 순양함 다카치호(高千穂)함 수석 항해사로 참전했으며, 전후에도 순양함 근무를 거친 후 오스트리아 주재 해군무관으로 파견됐다. 1908년에는 중좌(한국군의 중령 해당)로 진급하여 독일 해군무관으로 재발령 됐으며, 1911년 5월에는 일본으로 귀환해 순양함 오토와(音羽)함 수석사관으로 배치됐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는 주미 일본대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보직됐으며, 미국에서 근무하던 중인 1917년 4월에 대좌로 진급했다.

노무라는 귀국 후 처음에는 순양함 야쿠모(八雲)함 함장으로 발령이 났으나, 불과 한달 후 일본 총참모부로 다시 전속된 후 베르사유 평화회담에 일본 대표단 일원으로 파견됐다. 회담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국으로 곧장 다시 파견되었으며, 그는 1921년~1922년까지 미국에서 체류하며 워싱턴 해군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노무라는 1922년 6월자로 소장(小將)계급으로 진급했으며, 이후 해군 총참모부 교육국장, 1원정함대 사령관 등을 지내다가 1926년 중장으로 다시 진급했다. 제 1차 상하이 전쟁(혹은 1.28사변)이 발발했을 당시 노무라 중장은 제 3함대 사령관으로 보직되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 1869~1932)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전력의 상하이 상륙을 지원했다.

1932년 4월, 기치사부로 노무라 제독은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리던 히로히토(昭和) 천황(1901~1989)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중상을 입었다. 이날 함께 행사에 참석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사망했으며, 노무라 제독은 한쪽 눈과 다리를 잃었다. 노무라는 치료 중이던 1933년 3월 1일자로 대장 계급을 달았으며, 이후 군사참의원에서 잠시 군사참의관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에 전역했다.

전역 후 본격적으로 외교관이 된 노무라는 가쿠슈인(学習院)에서 2년간 외교관 수업을 받았으며, 1939년에는 아베 노부유키(阿部 信行, 1875~1953: 훗날 마지막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 내각에서 외무상이 되었다. 하지만 불과 2년도 되지 않은 1940년 11월에 다시 주미 일본대사로 발령 나 1939년부터 미국대사를 지내 온 호리노우치 켄스케(堀内 謙介, 1886~1979) 대사와 교대했다. 이 당시 노무라가 해군무관을 지낼 때부터 교분이 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그의 부임을 환영했다.

그는 미국 대사 부임 이후부터 1941년까지 주로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 국무장관과 협상하며 미-일 간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는 일본의 중국 침공,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대일 석유금수조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갔다. 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결정적인 이유는 1941년 12월 7일에 벌어진 진주만 공습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해군은 기습을 준비하면서 외무성 측에 비밀로 하고 있었으며, 실제 작전이 결행되자 뒤늦게 암호문 형식으로 각 해외 공관에 발송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라가 이 암호문을 전달 받은 것은 이미 공습이 끝난 12월 8일로, 전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비문 관리 담당자가 출근하지 않아 암호를 깨지 못한 것이다.

노무라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 ‘암호문의 해독 내용을 본 것은 이미 진주만 공습이 끝난 뒤’였다고 밝혔다. 노무라는 코델 헐 미 국무장관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노무라가 그간 전쟁을 막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닌 노력을 위로했다고 언급했으며, 헐 또한 훗날 회고를 통해 ‘일본 정부가 시간을 벌 목적으로 그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는 1942년 8월에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사실상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은퇴했다가 1945년 추밀원(枢密院) 의원으로 임명됐다.

종전 후 그는 미-일 관계 회복을 위해 미일협회(American Council on Japan)에서 활동하며 빈번하게 미국을 방문했으며, ‘신생’ 민주주의국가인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건전하게 설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말년에는 같은 와카야마현 출신인 마쓰시타 코노스케(松下 幸之助, 1894~1989) 파나소닉(Panasonic) 회장의 권유로 JVC(Victor Company of Japan) 이사로 활동했으며, JVC가 미국업체인 RCA(Radio City of America)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1954년 참의원(参議院: 상원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60년에는 가장 유력한 방위청장관 후보로 거론됐으나 스스로가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민간통제’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그는 군복을 벗은지 20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일본해군 제독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한 차례 재선했으며, 196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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