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9월, 동부전선 전개를 준비 중인 스페인 출신 구성부대인 '청색부대'원들의 모습.
: 스페인어 명칭 때문에 '아줄(Azul)' 사단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스페인 출신의 나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부대이며, 주로 동부전선에 전개됐다. 사단 정식 명칭은 독일국방군 제 250 보병사단이었으며, 파견한 스페인 측에서는 '스페인 육군 자원 사단'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국민파를 이끌고 승리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정권 장악 후 프랑코는 연합국-추축국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을 표방했으나,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받은 '빚'이 있었으므로 사실상 비(非)교전 당사국이지만 친 독일 국가로 분류됐다.
독일은 서부전선이 대략 정리가 되자 동부전선의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으며, 1941년 동부전선 개전을 계획하기 시작하면서 스페인 쪽에도 지원을 타진했다. 특히 스페인 외무장관인 라몬 세라노 수너(Ramón Serrano Suñer, 1901~2003) 및 스페인군 장군들에게 로비와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스페인도 '바르바로사' 작전 참가에 동의했다. 이에 1941년 7월 22일자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프랑코 총통은 '개인 자격으로 독일군에 입대'를 허용한다고 발표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약속했다.
양국이 동의함에 따라 독일군은 팔랑헤 당원(Falangist) 및 스페인군 출신을 중심으로 인원을 모아 보병 사단을 구성했으며, 독일 본토로 데려와 기초훈련을 실시했다.
통칭 "청색사단"으로 별명이 부여된 이들은 동부전선 전투에 참가하여 1941년~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주로 투입됐다. 하지만 연합군이 스페인 정부 자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자 결국 프랑코는 1944년 10월에 청색사단 철군을 명령했으며, 이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를 풀고 퇴거하여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그 와중에도 수 천 명이 프랑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일군에 그대로 남았으며, 독일 측은 이들을 제 121 보병사단에 흡수시킨 뒤 예하의 여단으로 재편해 "청색 여단"으로 운용했다. 이들 대부분은 결국 독일군 무장친위대(SS)에 흡수됐다.
청색 사단은 1941년 창설 당시 약 18,000명을 모집했으나 지속적으로 증편이 이루어지면서 1944년까지 약 47,000명이 편성되어 있었으며, 주로 레닌그라드 전투 방면에 투입됐지만 1943년 2월 9일 크라스니 보르(Krasny Bor) 전투에도 제 4 SS 사단 및 24사단 등과 함께 투입되어 소련을 상대로 승리했다.
해체 시점까지 청색 사단은 약 4,954명이 전사했고, 8,700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체 후 편성된 '청색 여단' 시절에는 약 372명이 소련에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대부분 전후까지 포로 상태로 지내다가 1954년 4월 2일에 국제 적십자(Red Cross)사의 주선으로 석방됐다. 하지만 스페인까지 살아서 귀국한 인원은 286명 뿐이었다. 한편 이 '청색사단'의 분전으로 부상을 입은 소련군 측 부상자는 49,300명을 헤아린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 포로가 된 스페인 병사들은 특이하게도 종전 후 한참 뒤인 1954년까지도 석방되지 못했다. 이는 프랑코의 스페인과 소련 간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 논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반공포로 수용소를 따로 설치하고 이들을 그 곳에서 관리했으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적십자가 중재에 나서 석방이 성사됐다. 이들은 스페인 정부와 소련 정부 간에 석방이 성사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일종의 개인 자격으로 인정되어 바르셀로나로 송환시켰다.
한편 포르투갈은 비슷한 시기에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o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가 집권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영국과 체결한 영-포 협정(1373)에 의거해 중립을 유지했으나 마찬가지로 심정적으로는 친 독일 및 친 이탈리아 성향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반공 분위기가 강해져 독일이 소련으로 전격 침공을 결정하자 이미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편에 섰던 150명의 포르투갈 출신 자원병들이 이 '청색 사단'에 함께 참가했다. 이들은 전부 스페인 병사들과 섞여 스페인 깃발 아래에서 싸웠으며, 별도의 '포르투갈' 부대를 구성하거나 인정받은 적은 없다.
'전쟁사 > 2차세계대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40] 네덜란드 해변에서 오토바이 시험 중인 독일 병사들 (2) | 2023.06.17 |
---|---|
[1945. 2. 13] 격파된 독일군 돌격포 뒤에 은폐 중인 자유폴란드 병사들 (0) | 2023.06.14 |
[1929. 6. 12]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일기 (0) | 2023.06.13 |
[1942] '간지 폭발(!)'의 코트를 걸친 독일공군 장교 (0) | 2023.06.10 |
[1942. 6. 1] 요크타운 항모, 미드웨이로 이동하며 긴급 수리 실시 (0) | 2023.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