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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2. 2. 19] 美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 서명...미 서부해안 재미 일본인 격리 개시

라마막 2023. 5. 26. 11:00

재미 일본인 가족인 모치다 ( 持田 )  가족이  2 차대전 발발 후 미국에서 단행된 재미 일본인 격리 정책에 따라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 헤이워드 (Hayward, CA) 에서 격리 수용소로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  사진은  1942 년  5 월  8 일 ,  도로시아 랑거 (Dorothea Lange) 가 촬영했다 .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직후, 미국 서해안 지역에 살고 있던 재미 일본인들이 적국이 된 일본에 협력하여 '5'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로 미 서부해안에 거주 중이던 약 110,000명의 재미 일본인들을 격리하도록 조치했다. 이들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71,000명이 있었고, 상당 수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미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들의 소명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이 재미 일본인 격리 정책과 관련해 이코노믹 리뷰지에 실렸던 내용: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 나치 독일은 국내와 점령지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이들을 따로 분류해 게토지구에 격리했으며 전쟁 중후반기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대 추산 약 10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의 만행은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태생적인 혈통과 민족 구분에 근거하여 국가가 강제로 구금한 뒤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사상 최악의 전쟁 범죄 중 하나로 손꼽는다. 하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물론 나치의 만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간 중 미국 역시 민간인들을 태생적인 민족과 혈통의 문제로 구금했던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1941127,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Pearl Harbor)에 정박한 태평양 함대에 기습을 가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막을 올렸다. 이날 미국의 피해는 처절했다. 전함 네 척이 격침되고 총 12척 이상의 배가 반파 당했으며, 항공기 188대가 소실되고 수병 2403명이 사망했다. 심지어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민간인 68명까지 사망하면서 2차 세계대전 참가에 유보적이던 미국 여론은 일시에 참전 분위기로 돌아섰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날리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부수적인 피해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서 워낙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는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미 서부 해안까지 전선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언론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이민자들, 즉 재미 일본인들이 미국 국내에서 5(Fifth Column)’ 노릇을 하며 일본과 내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물론 일부 언론은 이들이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훌륭한 미국인들이라고 변호하기도 했으나, 이미 전쟁이 시작된 판국이다 보니 미국 내의 여론은 이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 국장이 지휘하는 FBI는 이미 이들의 내통설이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하필 이때 니이하우사건이 밝혀지면서 일본계 2세들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니이하우 사건이란 진주만 공습 당시 피격당한 일본군 조종사인 니시가이치 시게노리(西開地 重徳)가 하와이 제도의 니이하우 섬에 추락하며 벌어진 사건이다. 처음 원주민들은 개전 사실을 몰랐으나 곧 그가 하와이를 기습하다가 추락한 적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원주민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시게노리는 니이하우 섬에 거주하던 현지 일본계 미국인들 세 명의 협력으로 무기를 얻어 인질까지 잡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재미 일본인들 처우 결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고, 이 사건을 직접 접한 미 서부사령관 존 드윗(John L. DeWitt) 중장은 재미 일본인들의 충성심을 심각하게 의심하며 이들의 격리를 주장하게 됐다.

초반에는 FBI 뿐 아니라 미 법무부까지 그들을 구금할 근거가 없다며 드윗 장군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결국 당장 전쟁 가능 지역인 캘리포니아주가 일본 이중국적자들에 대한 구금에 들어갔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곧 연방 정부 설득해 적국민 법(Alien Enemies Act)을 근거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국적자를 으로 지정하며 본격적인 격리 조치를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를 단행하면서 서부 해안에 인접한 주()에서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이들이 강제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하와이를 제외한 미 서부 해안에는 약 12만명에 가까운 일본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중 11만명 가까이가 군사시설에 마련된 일본계 격리 캠프에 강제수용됐으며, 이 중 62% 이상은 순수 미국 국적자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인구의 과반수 가까이가 일본계인 하와이였다. 연방 정부의 격리가 시작된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된 건 하와이 주의 제298/299 주 방위군과 하와이 대학교 ROTC 프로그램이었다.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이들에겐 총기가 지급되어 주요 거점의 방어 임무를 주었는데, 이들 부대에 다수의 일본계 2세가 섞여 있자 미 육군성은 이들이 일본과 내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미 전쟁부는 298/299 방위군에 소속되어 있던 현역 군인 중 일본계는 모두 임무에서 제외한 후 한곳에 모았다. 또한 ROTC 중 일본계 학생들은 모두 학생으로 다시 전역시킨 뒤 귀교 처리했다. 하지만 미국인으로 자란 이들은 자신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의심받는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이에 이들은 다시 자발적으로 건설공병대대를 꾸린 후 하와이 군정관이던 델로스 에먼스(Delos Emons) 중장에게 탄원했고, 에먼스 장군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이들은 VVV(Varsity Victory Volunteers)라는 이름으로 하와이의 제34 공병연대 예하에 배치됐다. 이들은 이후 11개월간 몸을 아끼지 않고 궂은 건설 작업 등을 도맡아 하며 서서히 미국 정부의 신뢰를 되찾았고, 194212월 존 맥클로이(John McCloy) 전쟁부차관이 이들을 직접 순시하면서 미 육군도 최종 결심을 내렸다. 즉 일본계 미국인들도 군에 입대시켜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에 미 전쟁부는 기존에 298/299 방위군에 소속되어 있던 일본계를 주축으로 하여대대를 편성해 제100 보병대대로 재지정했으며, 이와 별도로 독립 전투가 가능한 제442 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 현재의 여단과 동일한 제대 단위. 2차 세계대전 후 여단으로 전부 개편)을 창설한 뒤 일본계 미국인 자원병을 모집했다. 미 전쟁부는 주로 본토에서 온 일본계 미국인들이 부대의 대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봤지만 의외로 하와이 지역에서 호응이 커 VVV 출신의 1만명 이상이 두 부대에 참가했다.

이들은 초창기 훈련 과정부터 동료 미군 및 지도부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 반감을 샀다. 19431월까지 어렵사리 훈련 과정을 거친 100대대원들은 웨이드 헤이슬립 장군이 지휘하는 제85사단에 배속됐다. 이들은 정식 전투부대로 지정되자 부대원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부대 구호를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the Pearl Harbor)’로 정했다. 이들은 태평양 대신 유럽 전선에 투입이 결정되면서 19438월부로 제34사단 133연대에 배속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 전개됐다. 이들은 442 연대전투단이 오기 전까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활약하기 시작해 이탈리아, 몬테 카지노, 로마 등지에서 활약했다. 100대대에는 미군에서 활약한 재미교포인 김영옥 대령도 소속되어 있었다. 소위로 임관한 그가 100대대에 배속되자대대장은 한-일 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이해하고 다른 부대 전출을 권유했으나, 김영옥 소위는 여기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고 미국인만 있을 뿐이다라며 거절했다. 그는 몬테카지노 4차 공방전(‘다이어덤작전)에 참가했을 때 지도부가 적의 전차 전력을 확인하지 못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스스로 자원하여 어빙 아카호시 일병과 함께 적진으로 침투해 독일군 병사 한 명을 생포해오는 공을 세웠다. 연합군은 그를 취조하여 독일군 진영에 전차가 없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파악한 후 전선을 돌파했으며, 그 공로로 군단장 마크 클라크(Mark Clark) 장군이 직접 전선에 방문해 현장에서 자신의 전속부관인 대위의 계급장을 떼 김 중위에게 달아주며 즉석에서 대위로 진급시킨 일화가 있다. 이후 100대대는 후발로 도착한 442 연대전투단과 통합되어 전쟁 말기까지 활약했다. 특히 전쟁 말엽까지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싸운 이들은 4000명 단위의 부대로 출발해 14000명까지 증원됐으며, 이 중 9486명이 퍼플하트(戰傷章)를 수여받았을 뿐 아니라 21명의 명예 대훈장 수훈자가 배출됐고 8개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다. 특히 대통령 부대 표창 중 5개는 같은 달 안에 수훈받았을 정도로 442 연대는 치열한 전쟁터를 마다않고 누볐다.

한편 본토에서 강제수용된 재미 일본인 일부는 불법적인 구금에 대해 법정 투쟁에 나섰다. 프레드 고레마쓰 같은 인물은 행정명령 9066호가 미국 수정헌법 5조를 위반한다며 저항하다 체포됐고, 엔도 미쓰에 같은 여성은 1942년부터 법정 투쟁을 시작했다. 미 전시 재배치국(War Relocation Authority)1944년경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석방까지 제안했으나 그녀는 재판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제안을 거절했다. 심지어 엔도 미쓰에는 대부분의 재미 일본인들이 대부분 수용시설에서 풀려난 후에도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수용시설에 남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19441218일자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법원의 최종판결이 나기 전날인 1217일자로 공고를 내 19451월부터 구금되어 있던 재미일본인들의 귀향을 허가했다.

미국은 학교 역사 교재에 이 재미 일본인 구금사실을 기술함으로써 과거의 과오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반성할 과거는 분명하게 반성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도다. 미 정부는 1998년 프레드 고레마쓰에게 자유 대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여했으며, 강제수용에 저항했던 또 다른 인물인 고든 히라바야시에게도 2012년 같은 훈장을 사후 수여했다. 그리고 엔도 미쓰에 여사에게는 올해 이 상을 수여했다. 사실상 이 상을 수여한 것은 전시의 특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국민을 강제 구금했던 사실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성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도 역사 교과서 채택 문제로 논란이 많은 상황인데, 우리의 교재도 잘못은 잘못대로 분명하게 짚어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고, 공과는 공과 대로 짚어 오늘의 역사를 만든 분들을 기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오늘을 만든 건 단순히 과거의 과오 혹은 성공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https://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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