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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4. 17]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여성대원, 종전을 3주 남기고 처형 당하다

라마막 2023. 5. 24. 10:38

1945417, 네덜란드 오베르베인(Overveen)에서 촬영된 야네트여 요하나 스하프트 (Jannetje Johnanna Schaft, 1920~1945), 애칭 '하니 스하프트 (Hannie Schaft)의 모습. 그녀는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말, 그녀는 독일군에게 체포된 뒤 오베르베인의 해안가로 끌려나와 총살형에 처해졌다. 독일군 병사는 그녀의 머리를 겨누고 총을 당겼으나 이 첫 발은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부상만 입혔다.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방아쇠를 당긴 병사를 돌아보며 조롱조로 한 마디 했다.

"내가 쏴도 너보다는 잘 쏘겠다."

결국 처형당한 그녀는 그 자리에 매장됐으며, 시신은 전후에 이장되어 다른 421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함께 블루멘달(Bloemendaal) 국립묘지에 매장됐다. 여기에 매장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 중 여성은 그녀가 유일하다.

: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서 활약하면서 "붉은 머리 여자"라는 별칭으로 자주 불렸다. 레지스탕스 내에서는 코드명으로 "하니"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에 소속되어 있던 교사였으며, 1927년 언니 안나(Anna)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부모는 그녀를 다소 과잉 보호 하면서 키웠다고 한다. 요하나는 어려서부터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성년이 되면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고 한다.

요하나는 대학을 갈 나이가 되자 암스테르담 대학교로 진학해 1938년부터 학업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 유대인 친구 두 명을 사귀게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얼마 후 독일이 중립국 네덜란드로 침공했고, 1943년부터 독일 정부가 점령국 대학생들에게 충성 서약서에 서명을 강요하자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실제로 약 80%의 학생들이 서명에 거부하자 대부분 퇴교조치 됐으며, 그녀 역시 퇴교되어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얼마 후, 독일군이 유대인 색출을 시작하자 그녀는 대학에서 만난 두 유대인 친구들을 집에 숨겨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두 친구를 위해 신분증을 훔치면서 사실상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개시했다. 그녀는 대학을 떠나면서 "저항 위원회"라는 단체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 자체는 네덜란드 공산당과 관련이 깊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저 메신저 노릇이나 하기를 거부하고 실제 무기를 들고 싸우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그녀는 독일군에 대한 사보타주 임무를 맡아 독일군, 네덜란드 내 나치 동조세력, 협력자, 배신자들을 색출해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독일어를 배워 능숙해졌으며, 이를 이용하여 독일군 사이에 녹아 들어갔다.

하지만 요하나는 모든 임무를 다 수행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치 간부의 아이들을 납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녀가 거부한 이유는 '납치 과정에서 임무가 노출되거나 실패할 경우 아이들을 죽여야 하는데, 이런 테러행위는 나치들이 하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암살이나 사보타주 임무를 수행한 뒤 현장에 남아있는 것을 본 목격자들은 요하나를 '붉은 머리 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점령 독일군은 그녀를 지명수배자 1위로 올렸다.

1944621, 요하나는 저항세력 동지인 보네캄프(Bonekamp)와 독일군에 협력한 네덜란드 경찰과 나치 동조자인 빌렘 라휫(Willem Ragut)의 암살 임무를 맡았다. 두 사람은 임무에 성공했지만, 보네캄프는 라휫이 죽기 전에 쏜 총에 복부를 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가 체포됐다. 그는 병원에서 결국 요하나의 신원과 집 주소를 불었고, 당국은 곧장 그녀 집으로 출동해 그녀의 부모를 체포했다. 독일군은 요하나의 투항을 유도할 생각으로 부모를 덴 보쉬(Den Bosch)에 위치한 헤르조헨뷔스(Herzogenbusch)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요하나는 결국 사망한 보네캄프와 체포당한 부모 때문에 한동안 레지스탕스 활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나, 직접적인 혐의가 없던 그녀의 부모는 두 달 뒤 석방됐다.

이후 그녀는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선글라스를 쓰면서 신분을 감추고 다녔다. 그녀는 19453월까지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나치 세력에 협력한 네덜란드 주요인물들을 처단하고 다녔으나, 1945321, 유럽 전선 종전까지 불과 2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 어느 검문소를 통과하던 중 헌병에게 체포 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녀는 신문 배달을 가장하여 레지스탕스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암스테르담의 교도소로 송치된 뒤 취조와 고문을 당했으며, 독실에 수감되어 괴롭힘을 당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독일 쪽으로 전향해있던 옛 레지스탕스 대원인 안나 베인호프(Anna Wijnhoff)가 요하나의 머리카락 뿌리 쪽의 염색이 풀린 곳이 붉은 색인 것을 보고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

요하나는 1945417, 네덜란드 나치가 처형했다. 전쟁 말엽에는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 독일군 간에 '처형 금지 약정'을 체결해 서로 더 이상 포로들을 '처형'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녀는 종전을 불과 3주 앞둔 시점에 오베르베인에서 처형됐다. 그녀를 처형한 이들은 마르텐 카위퍼르(Marten Kuiper)와 마테우스 슈미츠(Mattheus Schmitz)라는 이들로 알려졌다. 요하나의 머리에 총을 쏜 이는 슈미츠였는데, 근거리에서 쏘고도 첫 발로 그녀를 죽이지 못하자 요하나는 '내가 쏴도 너보다는 낫겠다'며 조롱했고, 이에 카위퍼르가 다시 머리에 한 발을 쏴 그녀를 살해했다. 전후 그녀의 처형을 명령했던 이는 네덜란드 점령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던 빌리 라게츠(Willy Paul Franz Lages, 1901~1971)로 확인됐다.

사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내 뱉었다는 마지막 '조롱'은 정확하게 검증되지 않는다.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네덜란드 사학자들이 독일측 기록을 확인했으나 마지막에 그녀가 '내가 쏴도 너보다는 낫겠다'라는 말을 했다는 증거는 못 찾았으며, 전후 체포된 카위퍼르는 증언에서 '총성이 들려 가봤더니 (요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고 있었다. 슈미츠는 그냥 그걸 보고 있길래 들고 있던 기관총으로 그녀를 쐈고, 이에 그녀가 죽었다. 아마 한 발이 머리에 맞았는데 그 한 발이 치명상이 된 것 같다"고만 말했다.

전후 전범재판에서 카위퍼르와 빌리 라게스만 요하나의 처형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카위퍼르는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라게스 역시 사형을 언도 받았다가 1950년에 형이 확정됐으나, 1948년에 즉위한 율리아나 여왕(Queen Juliana/Juliana Louis Emma Marie Wilhelmina, 1909~2004)이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국 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네덜란드에서는 라게스가 유야무야 사면될 분위기가 조성되자 대대적인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율리아나 여왕은 1952년 라게스의 형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해 확정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형 집행이 정지되면서 1966년에 석방됐고, 독일로 돌아가 살다가 1971년에 사망했다. 한편 율리아나 여왕은 요하나에게 네덜란드 십자훈장을 수여했고, 미 정부 역시 아이젠하워 원수의 상신을 거쳐 그녀에게 대통령 자유대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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