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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5. 15] 50세의 나이로 미 해병대에 입대해 이등병이 된 경제학 교수

라마막 2023. 3. 17. 14:38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병대의 평균 징집연령은 21세였다. 하지만 폴 더글러스(Paul Howard Douglas, 1892~1976)가 입대 응모를 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 아내, 아이들, 직업을 모두 내던지고 패리스 아일랜드(Parris Island)의 미 해병 모병소를 찾아갔다.

입대 선서 중인 폴 더글러스 교수.

그는 1892년에 태어났으며, 경제학 교수가 되어 1916년부터 1942년까지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39년에는 시카고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원 생활도 했다. 1942년 즈음이 됐을 때에 그는 고위급 인사도 여럿을 알고 지냈다. 그 중에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 기자 시절에 알게 되어 나중에 해군장관을 지낸 프랭크 녹스(Frank William Franklin Knox, 1874~1944)도 있었다.

더글러스는 진주만 공습 5개월 뒤 녹스 장관의 도움을 조금 받아 미 해병대에 이병으로 입대했다. 그는 조국이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기 시작하자 직접 나라를 위해 전투에 참여하여 싸우기를 원했으며, 약간의 '연줄'이 있던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나이 50의 존경받는 경제학자이자 대학교수, 정치가인 이 사나이는 얼마 후 해병대 전투복을 걸치고 아들 뻘보다도 어린 교관의 지시에 따라 앞뒤로 구르며 훈련을 받았다. 신병 훈련소를 거친 더글러스는 일기에 자랑스럽게 적었다.

"내 자신이 아직도 잠깐 쉬자는 소리를 하지 않고, 중간에 의무실에 실려가지 않고도 격렬하고 힘든 신병 훈련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페리스 아일랜드 미 해병대 신병훈련소에서 교육 받는 중인 폴 더글러스

교관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긴 더글러스는 패리스 아일랜드에서 인사 부서에 배치됐다. 하지만 그는 루즈벨트 행정부와의 연줄을 이용하여 3주 후 진급시험을 보고 상병이 되었으며, 한달 후에는 하사가 되었다. 그는 지휘관(과 해군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병사 입대 7개월 만에 대위로 임관했다.

패리스 아일랜드에서 사격 교육 중인 폴 더글러스 이병

그는 미 제 7해병사단 3대대 부관장교로 근무 중 펠렐리우(Peleliu) 전투에 참가해 전선까지 가 부상자와 사망자 시신을 수거해왔다. 한 번은 전선의 병사들이 화염방사기와 로켓 발사기에 넣을 탄이 부족한 것을 보자, 그는 곧장 후방으로 뛰어가 필요한 것들을 수거한 다음 박격포탄과 소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을 통과해 동료들에게 전달했다. 그는 이 날의 영웅적 공헌으로 동성훈장을 수상했다. 그는 펠릴리우 전투 후반에 격렬한 교전에 참가하면서 수류탄 파편에 상처를 입어 인생 첫 전상장(퍼플하트)을 수여 받았다.

더글러스는 펠릴리우 전투 후 오키나와로 이동했으며, 그 곳에서도 젊은 해병대원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전장을 누볐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 중 소령으로 진급했다. 더글러스 소령은 결국 왼쪽 팔에 기관총을 맞고 후방으로 후송됐으나, 소령 계급 때문에 특별한 처우를 받지 않을 목적으로 들것에 누운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군복 위의 소령 계급장을 뗐다. 당시 이를 지켜본 부하인 폴 아이슨(Paul E. Iason) 일병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100년을 살더라도 이 장면은 평생 못 잊을 것이다. 그 곳에는 백발의 해병 소령이 팔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기관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고통받고 있는게 분명했음에도 차분했으며, 평생 본 적 없는 인간의 위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그냥 여기 두고 가게. 우선 젊은이들부터 후송해. 난 살만큼 산 사람이야. 그러니 이 친구들도 자기 몫만큼 살게 해주게.'라 말했다."

더글러스는 병원에서도 빨리 퇴원하여 전선에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 입원했다가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Bethesda) 해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14개월이나 지나서야 퇴원허가가 났다. 하지만 그는 이 곳에서 부상으로 인해 복무 불가 판정이 나 전역하게 됐으며, 왼팔은 거의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권총 사격 훈련 중인 폴 더글러스

더글러스 소령 휘하에서 복무한 한 장교는 그의 특출난 용맹성에 대해 말하며 "그 누구도 소령님을 전선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사랑했으며, 항상 부하들 곁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휘관을 지낼 때도 다른 장교들이 줄 앞으로 끊고 들어가는 것과 달리 항상 병사들과 함께 식사 줄에 서서 식사를 받았으며, 젊은 병사들을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라며 쓰레기를 치우곤 했다. 그는 부하들의 일을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했다. 그의 부대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를 항상 존경했다.

미 해병대는 그의 용맹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전역 1년 뒤인 19471월에 예비역 중령으로 진급조치 했다. 그는 전쟁영웅이 되어 시카고로 돌아왔으며, 1949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선거 당시 상대방 후보는 그와 토론하기를 거부했는데, 이에 더글러스는 혼자 빈 의자를 앞에 갖다놓고 질문을 한 후, 상대방 의자로 바꿔 앉아 경쟁 후보 대신 답변을 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Dr.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박사를 적극 후원했으며, 모든 미국인의 평등한 대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74세로 마지막 은퇴할 때까지 18년간 상원의원직을 유지했다.

1977, 패리스 아일랜드 방문자 센터에 더글러스 이름이 헌정됐다. 그의 아내인 에밀리 더글러스 여사는 이 날 개명식에 참석하여 타계한 남편을 대신해 헌정의 명예를 수락했다.

"남편은 인생 말년에 수많은 영예를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오늘 패리스 아일랜드에 자신의 이름이 헌정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게 있어 이보다 기쁘고 흥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글러스는 공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해병대를 지지했으며, 항상 해병대의 가치를 삶 속에 투영하며 살았다.

패리스 아일랜드 미 해병대 훈련소의 방문자 센터(Visitors Center)에 헌정된 폴 더글러스의 이름

"우린 누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각자의 기준을 갖고 있다. 폴 더글러스는 내 인생 전체를 통털어 가장 훌륭하고, 용감하며, 진실된 사나이였다. 그와 인생 한 순간을 교차하며 함께 난관을 헤쳐갈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며, 부상의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두고가라는 말에서 나타난 그의 고귀한 인품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 폴 아이슨 일병

사진=미 해병대/시카고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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