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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5. 3. 17] 영국군 라인강 도하작전에 참가 중인 몽고메리 원수

라마막 2023. 3. 22. 09:39

디지털 채색=Doug

1945317,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1st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1887~1976) 원수가 '플런더(Plunder)' 작전 리허설 과정에서 병사들과 함께 라인 강을 도하하고 있다.

: 어쩌면 원수를 달았던 서방 지휘관 중 가장 논란이 있는 남자.

몽고메리는 1887년 영국 서리(Surrey)에서 아홉 형제자매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아일랜드 교회(Church of Ireland) 목사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사목 활동을 하느라 지방을 전전했는데, 남겨진 모친은 아이들을 때리기까지 하면서 학대했다고 한다.

몽고메리는 세인트 폴 스쿨(St. Paul's School)을 다니다가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로 진학했으며, 1908년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한 뒤 왕립 워익셔(Warwickshire) 연대 1대대로 배치됐다. 그는 워익셔 연대 소속으로 인도로 파견 근무를 떠나 생애 첫 해외 근무를 경험했으며, 1910년 중위로 진급해 1대대 부관장교가 되었다.

1914,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몽고메리는 영국 제 4사단 10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 배치됐으며, 르 까또(Le Cateau) 전투와 몽스(Mons) 퇴각작전 등에 참전했다. 그는 19141013일 벨기에 국경에서 전투 중 독일군 저격수에게 저격 당해 오른쪽 폐와 무릎을 관통 당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제 47 사단 참모장으로 보직됐으며, 이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간전기 기간에는 다양한 참모 보직과 지휘관 보직을 옮겨 다니며 경력을 쌓았으며,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는 제 8보병사단 사단장을 지냈다.

몽고메리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최초 서부 사막 전투에 투입됐으며, 여기서 그는 19428월부터 영국 제 8군을 지휘해 북아프리카를 가로 지르며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Johannes Erwin Eugen Rommel, 1891~1944) 원수를 추격했다. 그는 2차 엘 알라메인(El Alamein) 전투를 거쳐 19435월 튀니지 전투까지 승리로 이끌면서 롬멜의 파죽지세 진격을 끊었으며, 곧 유럽 전선으로 옮겨 시칠리 상륙작전과 이탈리아 침공에 참가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후 연합참모부가 구성되자 몽고메리는 처칠의 추천으로 부사령관에 보직 됐으며, 1944년 중순으로 예정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미국의 아이젠하워(David Dwight Eisenhower, 1890~1969) 대장을 보좌했다. 하지만 연이은 마찰과 구설수로 결국 보직에서 물러나게 됐으나,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총리는 그의 자존심을 지켜줄 요량으로 제 21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 시키면서 원수로 진급 시켰다.

몽고메리 원수는 이후에도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발지 대전투에서는 북부 측방을 방호하는 임무를 맡아 미 제 1군과 9군을 지휘했으며, 진격 과정에서는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1885~1945)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 3군이 바스토뉴(Bastogne)를 해방할 때까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 말엽까지 그의 제 21 집단군은 루르지방을 돌파해 네덜란드를 해방했고, 북서부 독일을 점령한 뒤 194554일자로 함부르크 남쪽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전후 몽고메리는 라인 주둔 영국군(BAOR: British Army of the Rhine) 사령관을 지낸 뒤 영국 왕립 총참모부 총장(Chief of the Imperial General Staff)1946년부터 1948년까지 지냈다. 이후 서부 연합군(Western Union) 합동참모위원회 의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 연합군 부사령관을 지낸 뒤 1958년에 은퇴했다.

사실 그가 가장 논란인 부분은 '인성' 문제다. 아마도 '식민지 군대'였던 미군이 연합군 주도권을 쥐는 것을 '대영제국' 군인인 그가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이젠하워 휘하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그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고, 일부러 다리가 불편했던 아이젠하워를 영국까지 오라고 해 할 수 없이 다리가 불편한 아이젠하워가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한 채 회의를 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한 번은 아이젠하워와 의견 마찰이 발생하자 자리를 비울 수 없던 아이젠하워가 오마 브래들리(Omar Nelson Bradley, 1893~1981) 중장을 대신 보냈는데, 브래들리 말에 따르면 '협의하자고 부른 게 아니라 사람 앉혀놓고 자기 주장을 강요했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 한 대 치고 싶은 걸 참느라 앉아있는 내내 온 몸의 힘을 다 썼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영-미 연합군의 단합을 깨지 않기 위해 내내 몽고메리의 항명을 알고도 피했지만, 결국 극에 달하는 사태에 도달하자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이 자를 해임하던지, 아니면 나를 해임하라"고 통보했다. 아이젠하워는 일부러 전속부관을 통해 편지 내용을 몽고메리에게도 흘렸는데, 뒤늦게 아차 싶어진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으나 결국 처칠 총리는 연합군의 단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해 몽고메리를 연합군 부사령관에서 해임했다. 하지만 몽고메리의 사기를 꺾고 싶지 않던 처칠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를 21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 시켰고, 동시에 원수 계급을 달아주어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 아울러 집단군 사령관인 그가 원수 계급을 달게 됨에 따라 상위 보직자인 아이젠하워를 시작으로 미군 당국은 '원수(General of the Army; Fleet Admiral)' 계급을 신설해 수뇌부를 전원 진급시키는 조치를 하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는 이후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의 명성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게 네덜란드 아른헴을 거쳐 독일 본토를 찌른다는 '마켓 가든(Market Garden)' 작전을 밀어붙였으나 서방 연합군 최대의 대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롬멜을 잡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진격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며, 동시에 발지 대전투를 비롯한 굵직한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6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전역 후 고향에서 청소년 스포츠 단체 등을 후원하며 조용히 살았다. 말년의 몽고메리는 햄프셔 주 이싱턴(Isington)에 자리를 잡고 지냈으나 알 수 없는 사유로 1976년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몽고메리에게는 외아들 데이비드 몽고메리(David Montgomery, 1928~2020)와 두 손자가 있었으며, 아내인 베티 카버(Berry Carver)는 이미 1937년에 사별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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