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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4. 18]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부겐빌 순시 중 요격당해 전사

라마막 2023. 4. 15. 10:45

1943년 4월 18일, 미 해군 정보국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면서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1884~1943) 제독의 야전 순시 일정을 확보했다.

4일 뒤, 미 해군의 P-38 편대는 960km 이상 날아가 야마모토 제독이 탑승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항공기를 격추했다. 이 사진은 야마모토 제독이 순시에 나서기 불과 수 시간 전 라바울에서 마지막으로 촬영한 것이다.

: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과달카날 패전 후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 병사들을 순시하기 위해 남태평양 일대를 직접 둘러보기로 결정하면서 라바울까지 내려와 있었다.

미 해군 정보부는 야마모토의 일정을 해독하는데 성공하면서 그를 격추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고, 이에 "매직(Magic)"이라는 코드네임을 부여했다. 야마모토의 일정을 분석한 미 해군은 그가 4월 18일 오전 라바울에서 출발해 솔로몬 제도의 부겐빌(Bougainville) 인근 발라라에(Balalae) 활주로로 향할 것임을 확인했으며, 이 이동 구간에서 격추하는 것이 최적이라고 판단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프랭크 녹스(W. Frank Knox, 1874~1944) 해군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야마모토를 잡게"라고 구두로 명령했으나, 공식 문서로는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루즈벨트가 이 계획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녹스는 야전지휘관인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1885~1966) 제독에게 실행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고, 니미츠는 이에 남태평양 사령관인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Jr., 1882~1959) 제독과 상의 끝에 4월 17일자로 작전을 재가했다.

작전에는 미 육군항공대(USAAF: US Army Air Force) 소속 록히드(Lockheed) P-38 라이트닝(Lightning) 대대를 배정했으며, 오로지 적절한 거리에서 요격이 가능할 때만 격추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조종사는 3개 대대에서 고르고 고른 조종사들로 배정했으며, 이들에게는 "일본군 고위 장교"가 타고 있다고만 알리고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4월 18일 오전, 야마모토는 기습 가능성 때문에 순시를 취소하시라는 야전 지휘관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미쓰비시 G4M (연합군 코드네임 '베티') 폭격기에 올랐다. 이 기체는 공간이 넉넉한데다 무장을 탑재하지 않을 경우 속도도 괜찮았기 때문에 VIP 수송용으로 자주 쓰이던 기체였다. 그는 라바울을 출발했으며, 507km를 비행해 부겐빌로 향할 예정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는 여섯 대의 미쓰비시 A6M 영식함상전투기가 호위로 배정됐다.

비행 경로 상에서 대기하던 미 육군항공대는 일본군 수송기가 접근하자 렉스 바버(Rex T. Barber, 1917~2001/대령 전역) 중위부터 교전에 들어갔다. 그는 교전 중 T1-323기(야마모토 승선기) 측면을 잡아 기총소사했으며, 해당 기체는 곧 좌측 엔진에서 연기를 뿜으며 하강했다. 바버는 기수를 돌려 잔여 기체와 교전에 들어갔고, 야마모토의 수송기는 정글에 추락했다.

추락 다음 날 일본 측은 부겐빌 섬에 공병장교인 하마스나 츠요시 중위가 이끄는 수색대를 급파했으며, 곧 추락 지점에서 항동기를 찾았다. 그가 야마모토의 시신을 찾았을 때 시신은 항공기에서 좌석 채로 튕겨 나가 있었으며, 나무 아래에 처박혀 있었지만 여전히 좌석에 곧은 자세로 앉아 흰 장갑을 끼고 한 손은 허리춤의 일본도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하마스나의 말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뭔가 고민이라도 하듯 곧은 자세로 깊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고 한다.

사후 시신을 수거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5구경 기관포탄에 두 발을 맞은 상태였으며 한 발은 왼쪽 어깨, 다른 한 발은 왼쪽 아래 턱에 탄알이 박혀 있었다. 군의관은 부검 후 머리쪽에 맞은 한 발로 야마모토가 즉사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참혹한 부검내용은 일반에 공표했을 경우 사기 저하만 가져올 공산이 커 일본 군부는 이를 비밀로 감추었고, 훗날 야마모토의 전기 작가인 아가와 히로유키는 "상부의 지시로 부검결과 자체가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야마모토의 참모들은 그의 시신을 파푸아 뉴기니 섬 부인(Buin)에서 화장했으며, 화장한 재는 야마모토의 기함인 무사시(武藏) 함에 승선시켜 도쿄로 돌려보냈다. 야마모토에게는 1943년 6월 5일자로 원수 계급이 추서됐으며, 1등 훈장과 함께 화장 재는 고향 나가오카 시의 타마 묘지에 안치됐다. 그의 후임으로는 고가 미네이치(古賀 峯一,1885~1944) 제독이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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