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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4. 12] 루즈벨트 대통령, 휴가 중 조지아 주에서 서거

라마막 2023. 4. 12. 22:05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를 알린 1945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즈.

1945412,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이 급성 뇌출혈로 서거했다. 향년 63. 사망 당시 그는 조지아 주 웜 스프링스(Warm Springs)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미국사에서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4선 출마를 앞두고 3선까지 부통령이던 급진주의 성향의 헨리 월러스(Henry A. Wallace, 1888~1965)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과 교체했으며, 19444선 승리 후 임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루즈벨트 서거 후 바로 다음 날 트루먼이 루즈벨트의 4선 임기를 승계하여 대통령 선서를 했으며, 규정에 의해 루즈벨트의 임기 절반 이상을 승계함에 따라 이를 1선으로 인정했다.

루즈벨트의 서거는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특히 2차대전을 함께 이끌었던 연합군 지도자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 등은 아직 전쟁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루즈벨트의 유고 상황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루즈벨트의 유해는 조지아 주에서 워싱턴 DC로 운구되었으며, 다시 이는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뉴욕 시 내 하이드 파크(Hyde Park)로 옮겨졌다. 세계 경제대공황부터 2차세계대전까지 미국이 직면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잘 이끌어 나갔던 이 지도자의 마지막 길에는 수 만 명의 조문객이 운집하여 환송했다.

: 원래 여러모로 건강이 좋지 않던 인물이다. 성년이 된 뒤에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다리가 마비됐는데, 그는 대중 앞에서 자신이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주로 앉은 모습으로 대담을 했다. 얄타 회담에서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이 앉은 상태로 기념촬영을 한 것이 대표적. 간혹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는 그의 장남과 비서실장이 문자 그대로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낀 후 그를 양쪽에서 "들어서" 공중에서 옮겨 다녔을 정도다. 그 외에도 그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골초였고, 경제 위기와 전쟁까지 겪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최소 1940년경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62세 생일(1944. 3)을 맞아 베데스다(Bethesda) 미 해군병원에서 종합 검진을 받았으며, 이 때 고혈압과 죽상동맥경화증, 관상동맥질환이 있어 심장 협심증과 울혈성 심부전증세가 있다고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과 외부 전문가는 루즈벨트에게 휴식을 권했으며, 개인 주치의였던 군의관 로스 맥킨타이어(Ross T. McIntire, 1889~1959) 제독(해군중장)은 루즈벨트의 일일 스케줄에서 손님과 함께하는 점심을 금지시키고 하루에 두 시간씩 무조건 휴식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1944년 선거가 다가오자 루즈벨트와 참모들은 그의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외부에 말하고 다녔는데, 이는 선거도 선거지만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었으므로 적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다.

루즈벨트는 19444선에 성공했으나 건강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특히 얄타(Yalta) 회담에 다녀오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으며, 이 때문에 1945329일부터 휴가를 내 조지아 주 웜 스프링스의 리틀 화이트하우스(Little White House)로 갔다. 그는 당초 1945425일로 예정된 국제연합(United Nations)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연설할 예정이었으므로 이 때까지 푹 쉴 예정이었다.

1945412, 루즈벨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화가와 마주 앉아있던 중 갑자기 두통을 호소했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고 한 직후 의자에서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졌으며, 곧 침대로 옮겨졌으나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던 심장병 주치의인 하워드 브뤼엔(Howard Bruenn, 1905~1995) 박사는 루즈벨트를 살펴본 뒤 응급 상황을 선언했다. 브뤼엔 박사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규모 뇌출혈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이후 급파되어 온 의료진들은 루즈벨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결국 오후 3:35분에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이튿날 오전, 백악관 측은 루즈벨트의 관 위에 성조기를 덮은 후 워싱턴 D.C.까지 기차편으로 운구했으며, 414일에는 루즈벨트의 관을 백악관에 안치한 후 조문객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이 태어난 뉴욕시 하이드파크에 묻히기를 원했으므로, 묘는 하이드파크 에 개인 사비로 마련해 놓은 스프링우드(Springwood) 부지 내 장미정원으로 잡았다. 그의 장례식은 415일에 치러졌다.

루즈벨트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 하나인 엘라노어 루즈벨트(Elanor Roosevelt, 1884~1962)와 실제로는 소원한 관계였으며, 심지어 엘라노어의 개인 비서로 채용했던 루시 머서(Lucy Mercer Rutherford, 1891~1948)라는 여성과 내연 관계였다. 엘라노어는 이미 1918년 두 사람이 주고받던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루즈벨트와 이혼하고자 했으나, 그랬다가는 정치적 생명에 타격이 올 것을 우려한 루즈벨트는 엘라노어를 설득하면서 두 번 다시 루시 머서를 만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엘라노어와 각방을 쓰겠다고 약속하며 이혼을 막았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이 약속 뒤에도 지속적으로 루시 머서와 밀애를 즐겼으며, 심지어 루즈벨트의 장녀이던 애나 루즈벨트(Anna Roosevelt Halsted, 1906~1975)는 아버지의 불륜이 발각되어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행각이 발각되지 않도록 도왔다.

사실 루즈벨트가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서거하던 날에도 루시 머서가 같은 웜 스프링스 내에 묵고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루즈벨트가 그녀의 집에서 죽었다'는 억측이 돌기도 했으나 사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루즈벨트가 서거하던 순간 엘라노어는 웜 스프링스에 함께 있지 않았다.

루시 머서는 루즈벨트 서거 3년 뒤인 1948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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